우리는 종종 말한다.
“그 사람은 이제 없어요.”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가 남긴 말 한마디, 글 한 줄,
그의 웃음소리, 다툼 속에 남긴 단어들,
그 사람의 방식, 어투, 표현, 침묵마저
우리는 여전히 기억하고 반복하며 사용한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언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죽은 자들은 침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존재’를 ‘흔적(trace)’으로 설명한다.
흔적은 단지 자취가 아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리 삶에 작용하는 어떤 실재다.
그 실재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언어의 구조, 기억의 리듬, 반복되는 행동 안에 살아 있다.
즉, 그들은 ‘살아 있음’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은 잃었지만,
언어의 장場 안에서 여전히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학도 이 주장에 응답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죽은 자들의 귀환’이라 불렀다.
무의식은 종종 타인의 말, 부모의 말, 잊었다고 믿은 과거의 상처로 작동하며,
그것은 살아 있는 나의 행동을 결정짓는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이미 죽은 자들의 말이 녹아 있으며,
그들은 내 입을 통해 다시 발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그가 생전에 했던 말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을 지배한다.
정치가의 연설, 작가의 문장, 스승의 한마디,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음성.
이 모든 말은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존재의 파편이며,
그 파편은 산 자의 사유와 감정, 선택을 형성한다.
죽은 자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꿈 속에서,
우리의 일상 언어 안에서,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습관 안에서.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는 지금,
죽은 뒤에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살고 있는가?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누군가의 마음에 새겨진 말,
세상에 기록된 문장,
타인의 영혼에 흔적을 남긴 단어들은
죽은 자가 말하고 있는 언어다.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의 의식 속에 작동하는 나,
누군가의 감정과 태도, 언어와 행동에 영향을 주는 나.
그것이 진정한 죽은 뒤의 지속이며,
사후 존재의 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남기는 말들은
미래의 누군가 안에서
내가 다시 살아날 방식이다.
나는 어떤 말로 남을 것인가.
나는 누구의 꿈에 출현할 것이며,
누구의 언어에 스며들 것인가.
나는 누구의 무의식 안에서
계속 살아 있을 것인가.
죽음은 말의 끝이 아니다.
죽음 이후에도 말은 남는다.
그리고 그 말이 곧 나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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