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들의 방문으로 동네 개들이 짖어대고,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 위로 웃음과 세월이 함께 흐르는 추석이다. 이 풍요로운 시간의 한가운데, 어김없이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할아버지는 양촌리 커피를 마시며 나직이 “나 때는 말이야….” 그 순간, 손주들의 머릿속에는 발음도 비슷한 달콤쌉쌀한 커피, ‘라떼’가 떠오른다.
‘라떼는 말이야’는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선, 한 시대의 상징적 외침이자 방어기제이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절대적인 잣대로 삼아 현재를 재단하려는 일방적 소통 방식에 대한 날렵한 풍자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문법 속에서,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몸으로 겪는 세대가 보내는 무언의 신호이기도 하다. 마치 날아오는 돌멩이를 가볍게 피하듯, 그들은 ‘라떼’라는 단어 뒤로 숨어 어른들의 세계가 휘두르는 ‘경험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다.
하지만 이 현상을 단순히 ‘꼰대’ 문화에 대한 저항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구조의 절반만 보는 일이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그들은 그토록 ‘나 때’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들의 ‘라떼’는 정말 쓰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그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는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존재의 증명이자, 험난한 세월을 건너온 자신에게 바치는 훈장일지 모른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했던 산업화 시대의 서사,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며 공동체의 가치를 따라야 했던 집단주의의 기억. 그 시간의 퇴적층 속에서 건져 올린 무용담은 그들의 정체성이자, 당신에게 사랑과 염려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일 수 있다. 문제는 그 표현 방식이 서툴고, 때로는 현재의 맥락과 어긋나 일방적인 가르침처럼 들린다는 점에 있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했듯, 그들이 전하려는 ‘사랑’이라는 메시지는 ‘일방적 회고’라는 미디어에 담기는 순간, ‘잔소리’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추석의 찻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떼’라는 방패 뒤에 마냥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 방패는 상처를 막아줄 뿐, 관계를 열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거리두기를 넘어선 ‘적극적 번역’의 자세이다.
할아버지의 “내가 니 나이 때는 소 팔아서 대학 갔다”는 말을 ‘요즘 애들은 노력도 안 한다’는 비난으로만 듣지 말고, ‘나는 너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다’는 서툰 사랑 고백으로 번역해 듣는 것이다. 어머니의 “요즘은 너무 쉽게들 사는 것 같아”라는 푸념을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의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위로의 요청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방적인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작은 기술이다. “그때 정말 힘드셨겠어요. 어떤 점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일방통행이던 과거의 서사를 현재와 미래를 잇는 쌍방의 다리로 바꿀 수 있다. 그들의 독백을 우리의 대화로 끌어오는 순간, ‘라떼’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닌, 세대를 잇는 따뜻한 음료가 될 수 있다.
이번 추석, 누군가 당신에게 추억의 ‘라떼’를 건네거든, 잠시 눈을 감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의 향을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쌉쌀함 속에는 한 사람이 온몸으로 살아낸 역사가 있고, 그 달콤함 속에는 당신을 향한 서툰 애정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과거를 현재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지혜, 그것이야말로 단절된 세대를 잇고 풍요로운 명절을 완성하는 가장 따뜻한 소통의 기술이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Job談 –브랜딩, 마케팅, 유통과 수출 그리고 일상다반사까지 잡담할까요?
E-mail: brian@hyuncheong.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