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하지?” 어느 청년의 뼈를 때리는 통찰이다.
태어남은 선택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태어날 곳과 시간, 가족을 고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무작위’로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이 무작위성은 인간에게 첫 번째 숙명이다. 우리는 자신이 지닌 유전자, 환경, 계급, 문화를 선택하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씨앗이 어디에 뿌리내릴지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될지 모르는 존재’로 시작한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않았고, 누구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이라는 물결에 던져졌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시간 속을 걷는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 우리는 그저 ‘잠시’ 머무를 뿐이다.
하지만 그 ‘잠시’가 너무 길고, 너무 아프다.
죽음 역시 선택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 죽음의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시점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죽음의 불확실성’이라 부른다. 죽음의 시각과 방식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긴다. 이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두 번째 숙명이다.
이 두 가지 숙명—태어남의 무작위성과 죽음의 불확실성—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태어남(natality)’과 ‘죽음(mortality)’이라는 두 축 위에서 삶을 이어간다. 이 두 축은 우리의 존재에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태어남의 부조리: ‘나는 원한 적 없는데’
장자(莊子)는 “나는 내가 되기 전에 누구였는가?”라고 묻는다.
이 물음은 단순한 철학적 유희가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이름과 국적, 계급, 심지어 종교와 정치 성향까지 부여받는다. 누군가는 귀하게, 누군가는 버려진 채로 세상과 대면한다. 이것이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는 이 ‘출발점’을 신의 섭리, 카르마, 윤회, 또는 시험이라고 부른다. 고통받는 이유조차 ‘전생의 업’ 탓으로 돌리며 인간의 고난을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과연 위로가 될까? 아니면 현실을 수용하라는 압박일 뿐일까?
죽음의 무정부성: ‘순서가 없다’
병실에서 본다.
백세 노인이 여전히 건강한 숨을 쉬는 옆 침대에서,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이 조용히 눈을 감는다. 죽음은 나이도, 성격도, 공덕도 가리지 않는다.
‘먼저 죽을 것 같았던 사람은 살아 있고, 웃고 떠들던 사람은 그 다음 날 영정 속에 있다.’
이는 불교가 말하는 무상(無常)의 진실이며, 기독교의 ‘도적같이 온다’는 종말론과도 닿아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 불렀다.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죽음만이 삶을 진지하게 만든다고 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기한’인 셈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 손에 있지 않다면 인간은 그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은 하나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직 우리의 몫이다.
예수는 말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석가는 말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기(緣起)한다.”
그리고 니체는 말한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태어남은 선택이 아니었고, 죽음은 예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의 태도, 즉 사랑할 것인지, 증오할 것인지, 침묵할 것인지, 외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운명은 정해진 지도를 주지 않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나침반을 들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 아니었을지라도,
이 세상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는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고, 죽음은 그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숙명적 조건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불안이자,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원동력이다. 종교와 철학은 이 숙명을 신의 섭리, 인연, 순환, 자유와 책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인간 존재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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