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EIU(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의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는
한국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Full Democracy)’로 분류했다.
세계적으로 이 타이틀을 보유한 국가는 단 20여 개.
그 가운데, 노르웨이, 스웨덴, 뉴질랜드, 캐나다처럼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에 걸쳐 정치적 안정을 이룬 나라들이 대다수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군주제가 잔존했더라도 입헌주의가 일찍 자리 잡았고,
시민혁명과 계몽주의의 연장선에서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민주주의’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나라다.
이 평가가 진정 놀라운 이유는 단순한 ‘현재의 점수’ 때문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극한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조립해온 과정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했던 나라, 민주주의를 이루다
- 왕조체제의 유산을 민권의 외침으로 흔들었던 동학농민군,
- 식민지 아래에서 상하이 임시정부가 근대 헌법을 기초하며 민주국가를 꿈꿨던 민족,
- 광복 후, 이념 갈등과 외세의 장기판 속에 남북 분단과 내전을 치른 비극의 주체,
- 4·19와 5·18, 6월 항쟁과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시민 주도의 민주주의 투쟁의 계보,
- 정권 유지를 위해 헌법을 수차례 농락한 권위주의 정권들,
-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산주의와 대립해 ‘실질적 내전 상태’를 지속하는 냉전 최전선의 분단국가.
불과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40년도 채 안 된 시간에 이룬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성과라는 점에서,
이는 한국 시민사회의 역동성과 제도 발전의 속도,언론의 자유, 선거 공정성, 시민참여의 질적 성장 등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군부 독재로부터 촛불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함께 이룬 서사’였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고,
아무도 믿지않았던,
예측할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 모든 조건이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로막는 불가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안에서 길을 만들어 왔다.
민주주의는 선물이 아니라,
“거리에서, 광장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투표함 앞에서 피워 올린 삶의 방식”이었다.
프랑스나 미국보다 앞선 민주주의?
프랑스는 근대 민주주의의 요람이고,
미국은 헌정 질서와 권력 분립의 상징이지만,
오늘날 이 두 나라는 민주주의의 위기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3년 EIU 지수에서
- 프랑스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
- 미국 또한 마찬가지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되었다.
- 반면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로 단독 진입했다.
한때 국민이 계엄령에 떨고, 검열에 숨죽이며, 투표함 앞에서도 속으로 울던 그 나라가,
이제는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 극적인 역전.
이건 통계가 아니라 문명사적 사건이다.
그 찬란한 한 줄의 평가
EIU는 정치문화, 선거과정, 정부기능, 시민의 자유, 정치참여 등 5개 항목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수치화한다.
이 평가에 따르면 한국은
- 군사정권을 넘어 시민이 이끈 민주주의,
- 언론의 자유와 선거의 투명성,
- 활발한 정치참여와 시민운동 등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촛불 시민혁명은 그 정점이었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든 집단 서사임을 증명한 사건.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고,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 자랑스러워해도 좋았다.
그러나, “완전한 민주주의”는 정말 완전했는가
이 평가가 예측하지 못하고 놓친 것이 있다.
민주주의의 반동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늘 무너질 위험과 동시에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함께 품고 있다.
2016년, 우리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민주주의가 권력의 사유물이 될 수 있다는 가장 충격적인 교훈을 얻었다.
대통령이란 이름 아래 사인(私人)의 국정개입, 인사 전횡, 공공 권한의 유린이 국가 운영의 일상으로 탈바꿈했을 때,
시민은 광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촛불을 들었다.
그 불빛은 정권을 바꾸었고, 헌법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금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후 7년.
민주주의는 다시 도전받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 검찰 권력의 사유화를 넘어,
- 입법부를 무력화시키고, 헌법기관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단하는 전대미문의 헌정농단을 자행 중이다.
- 국회의 입법권을 대통령령으로 무력화하고,
- 헌법재판소를 특정 이념의 보루로 전락시키며,
- 감사원과 검찰,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전복시키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군홧발’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침식이다.
법의 언어로 권리를 억압하고, 절차의 외양으로 자유를 봉쇄하는 시대.
그 안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얼마나 덧없이 느껴지는가?
이제 우리는 냉정하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정말 완전한 민주주의를 살고 있는가?”
2024년 12월 3일 이전까지는 그랬다.
- 투표율이 높다고 참여가 깊은 것은 아니다.
- 언론은 자유롭지만, 편향과 프레임 싸움은 도를 넘었다.
- 시민의 참여는 늘었으나, 참여의 질은 정치 혐오로 전락했다.
- 언로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클릭 장사와 진영 프레임에 점령당했고
- 정당은 다양하나, 양당제의 팬덤 정치가 정치의 품격을 삼켜버렸으며
- 정치는 실종되고, 권력의 싸움만 남은 의회는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 국회는 민의를 반영하기보다 정파의 볼모가 되었다.
우리가 얻은 것은 ‘완전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이지만,
잃어버린 것은 서로를 믿고, 대화할 수 있는 공론장의 공간이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고,
법치를 수호해야 할 정치인들이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완전한 민주주의’일까?
완전함의 역설, 민주주의의 피로
한국 사회는 지금 극단화된 정치, 탈진한 시민, 분열된 공동체라는 세 가지 징후를 보이고 있다.
- 정치의 양극화는 상대를 토론의 상대로 보지 않고, 숙청의 대상으로 여긴다.
- 시민의 피로감은 정권이 바뀌어도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를 낳는다.
- 지역과 세대의 단절은 대화가 아닌 혐오를 만들고, 혐오는 다시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민주주의가 위기인 건, 전체주의가 강해져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지루하고, 귀찮고, 무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여전히 ‘시민’이다
그러나 희망은 여전히 시민에게 있다.
- 촛불혁명은 제도 너머의 민주주의 가능성을 열었다.
- 국민청원, 공론화위원회,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디지털 참여 민주주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 정치에 도전하는 청년들, 제도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시민운동은 한국 민주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는 유기체’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율되는 악보이다.
음이탈도, 불협화음도 있지만, 결국 다시 함께 연주해야 할 악기이다.
이제는 ‘깨어 있는 시민’에서 ‘설계하는 시민’으로
민주주의는 기억의 전쟁이다
민주주의는 완성품이 아니라,
끝없이 오류를 수정하고, 기억을 붙잡고, 서로를 신뢰하려는 의지의 반복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 촛불광장에 있었고
- 퇴진 운동과 개헌 운동의 경험 속에 있었고
- 이주민과 노동자, 장애인과 여성, 청년과 노년의 삶이 서로 엮여 움직이는 그 실천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깨어 있는 시민”에서
“설계하는 시민”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시가 아니라 제안을,
분노가 아니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살고 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민주주의를 함께 만들어갈 의지가 있는가?”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참여하는 시민’을 넘어서
‘정치를 설계하고 제도를 제안하는 시민’이다.
정치는 국회의원의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는 이름이다.
여운처럼 남겨두고 싶은 말
완전한 민주주의란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지켜내려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선물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열망’이 아니라
‘소수의 인내’와 ‘전체의 책임’이 함께 만든 결과다.
그날의 촛불이 오늘의 화염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 묻고, 바꾸고,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관람이 아니라, 창작이다.
당신의 참여가, 바로 그 작가의 첫 문장이다.
역사는 증명했다.
한국은 수많은 불가능을 넘어, 가능을 창조해낸 민족이다.
민주주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아시아의 작은 반도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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