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거울 앞에 섰다.
피부는 예전 같지 않고,
주름은 말없이 계절을 새긴다.
그러나 눈빛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 눈빛이, 묻는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오랫동안 여성의 몸은 타인의 것이었다.
가문을 위한 처녀였고,
남편을 위한 아내였으며,
자녀를 위한 어머니였다.
몸은 늘 ‘누군가를 위해’ 존재했다.
그 ‘누군가’ 속에는 정작 자기 자신이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말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특히 중년 이후의 여성의 성과 욕망은 더더욱 금기였다.
그들은 이미 아이를 낳았고, 가정을 꾸렸으며,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욕망받을 필요 없는’ 것이 되었다.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를 욕망하는 것조차
부적절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은 생물학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의 문제다.
몸은 살아 있는데,
사회의 시선이 ‘끝났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중년 여성의 몸은 침묵당해왔다.
그 욕망은 부끄러움으로 은폐되었고,
자기표현은 ‘나잇값’이라는 조롱에 갇혔다.
여성은 욕망할 수 있었지만,
욕망을 ‘말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것이 이 사회가 여성의 몸을 통제해온 방식이었다.
식민지가 주체를 지우고 타자로 호명하듯,
여성의 몸도 오랫동안 ‘자기 것’이 아니었다.
‘예쁘다’, ‘관리 잘했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들은
몸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암시하는 지배의 언어였다.
그러나 지금,
질문은 다시 여성 스스로의 입으로 돌아왔다.
“이 몸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나를 욕망해도 되는가?”
“나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성 해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권리에 대한 물음이고,
한 사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선언이다.
나이 들어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도록 길들여졌을 뿐이다.
그 욕망은 타인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다.
그것을 빼앗긴 삶은
욕망 없는 몸으로 살아가는 불완전한 생존일 뿐이다.
이제는 여성도 ‘누구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몸도, 말도, 욕망도.
중년의 여성이 자신의 성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오랜 억압의 역사에 대한 탈식민 선언이다.
“나는 나다.”
이 문장이 허락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잃어야 했던가.
그 시간들을 되찾는 일은,
이제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나의 것이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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