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영혼의 자유라고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 자유 안에서 내 목소리를 잃고 있었다는 것을.
여성으로서의 나는,
기도는 할 수 있었지만, 설교는 할 수 없었다.
예배당을 청소할 수는 있었지만,
그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할 수는 없었다.
눈물은 환영받았지만, 분노는 불경으로 간주되었다.
헌신은 칭찬받았지만, 질문은 의심으로 몰렸다.
신앙 안에서 여성은 오랜 시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믿음 좋은 권사님’, ‘기도 많이 하는 사모님’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 어떤 호칭 속에도
‘한 사람의 나’는 없었다.
그들은 믿음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거했고,
자기 욕망과 분노, 질문, 열망을
‘육체의 소욕’이라며 스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감정들은
기도 중에 터지는 눈물로,
밤새 마르지 않는 통성으로 흘러나왔다.
신이 그 눈물을 원했을까?
아니, 그 눈물은 신에게조차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묵인된 구조의 부산물이었다.
종교는 구원의 길이었지만,
그 길목은 너무 자주 ‘성별’로 나뉘어 있었다.
여성의 영성은 침묵 속에 순결해야 했고,
희생 속에 아름다워야 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종종
‘말이 없다’, ‘잘 따른다’, ‘반항하지 않는다’의
완곡어법이었다.
하지만 진짜 믿음은 복종이 아니라 마주봄이다.
진짜 신앙은 침묵이 아니라 질문에서 시작한다.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리,
자기 욕망을 인정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영성이 숨 쉬는 곳이다.
여성이 종교를 떠난다는 것은
신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무신앙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신앙이다.
기도의 언어를 버리기보다는,
기도 안에서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이제야 말로 꺼내는 것.
하나님 앞에서조차 숨겨야 했던
내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것.
신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면,
왜 여성은 그 자유로부터 예외여야 했는가?
어쩌면 여성의 종교 탈출은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을 갱신하는 일이다.
자신의 언어로 기도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신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지워온 시간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
그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나로 믿고 싶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종교는 여전히 여성에게 말한다.
섬기라, 따르라, 기다리라.
그러나 이제 여성은 말한다.
“나는 믿되, 지우지 않겠다.
나는 사랑하되, 잃지 않겠다.”
믿음과 해방이 충돌하는 시대,
여성은 선택을 요구받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믿음 안에서
스스로를 선택하고 있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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