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실實] 여성,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다생물학적 존재에서 존재철학으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이 문장은
단순한 페미니즘의 선언이 아니라
존재론적 경고였다.

나는 누구인가.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기 이전에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리고 지금, 나는 정말 나로 살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
성별이 삶의 방향을 정해버린다.
성별은 제도이고, 예측이고, 기대이며,
그 안에 감정과 자유와 질문은 배제되어 있다.

‘여자다움’이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삶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했는가.

예쁘고, 조심하고, 감정을 누르고,
배려하고, 참으며,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아내’로,
혹은 ‘누군가의 엄마’로 완성되는 삶.

그 모든 역할 속에서
여성은 ‘사람’이기보다 ‘기능’이 된다.
존재가 아니라, 용도가 된다.

정희진은 말했다.
“여성의 삶은 늘 누군가의 타자였고,
늘 가족과 제도를 위해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말은
한국 여성들의 일상에서 너무 익숙한 진실이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성별조차 퍼포먼스라고 했다.
여성다움도, 남성다움도
사회가 부여한 행동의 반복일 뿐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여성들은
그 퍼포먼스를 거부할 자유조차 없었다.
그 자유를 말하는 순간,
불편한 사람, 이상한 사람,
불효자식, 문제적 며느리가 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언어를,
존재의 윤곽마저 억제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여성은 ‘몸’이 아니라 ‘존재’다.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의식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사유의 주체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몸을 지닌 삶이 아니라,
그 몸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관계 맺고, 자기 삶을 기획하는
하나의 철학적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정도면 만족’이라는 타협으로 살아갈 수 없다.
진짜 질문은 이렇다.

“나는 나로 존재한 적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는 어디까지 허락받았는가.”
“지금, 나는 누구인가.”

이제 우리는 여성이라는 ‘타자화된 언어’에서
‘나’라는 주어로 옮겨갈 시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고,
존재로서의 선언이다.

“나는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유하고 있다.”

그 문장 하나로,
역사가 다시 쓰일 수 있다.

Leave a Reply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