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실실] 거룩함의 얼굴을 한 욕망왜 우리는 '영적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기대하게 되었나

사람들은 왜 어떤 목사에게
‘기름 부음이 있다’고 말하고,
그가 손을 들면 울고,
그가 꾸짖으면 ‘성령의 책망’이라 받아들일까.

그 목소리는 때로
폭력적이고, 전제적이며, 심지어 혐오조차 담고 있지만,
교인은 오히려 그를 ‘진리의 사자’라 부른다.

우리는 언제부터
하나님의 대리인을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기대하게 되었을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유는 책임을 낳고,
책임은 불안을 낳는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결정을 위임하고 싶은 충동
을 갖는다.

바로 그 틈을 종교가 파고든다.

보수 개신교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이 불안을 단단하게 포장해 왔다.
교인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말씀이 어렵다면, 목사님의 해석을 따르면 된다.
기도가 막히면, 기도 잘하는 이에게 안수받으면 된다.
결정이 어려우면, 영적 지도자의 입을 주목하면 된다.

그렇게 종교는 ‘의존’을 ‘순종’으로 바꾸고
‘무비판’을 ‘믿음’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목사는
예언자도, 왕도, 심판자도, 때로는 하나님처럼 군림하게 된다.

그는 교인들의 내면에 잠재된
‘강한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그가 휘두르는 카리스마는
사실 회중의 외로움과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만의 풍경이 아니다.
1960~70년대 미국 남부,
TV 부흥사들이 등장하던 시절,
짐 베이커(Jim Bakker)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art) 같은 목사들은
눈물과 통곡, 카리스마 설교로 수백만의 사람을 홀렸다.
그러나 그들의 사생활은
권력과 성적 일탈, 금전 스캔들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따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중의 욕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는 더 깊다.
민족적 트라우마와 산업화의 불안,
가부장 문화 속의 무비판적 권위 수용,
그리고 ‘대형교회는 축복의 증거’라는 왜곡된 성공 신학
‘카리스마’라는 환상을 조직적으로 키워냈다.

그 결과,
목사가 성도에게 말할 땐 “지도”지만,
성도가 목사에게 말하면 “불손”이 된다.
목사는 책망을 하지만,
회중은 질문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되는 구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보다 더 전제적인 폐쇄 회로다.

문제는 이 권위 구조가
교회의 외형이 커질수록 더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비서실이 생기고, 운전기사가 따라붙고,
목사실은 점점 넓어지며
회중은 점점 멀어진다.
그 틈을 채우는 것은
‘광장형 설교’와 ‘집단적 감정 도취’다.

결국, 교회는 공동체가 아닌 관객석이 된다.
신앙은 성장이 아닌 복종이 되고,
하나님은 스스로 만나는 분이 아니라
목사의 음성 속에만 존재하는 분이 된다.

회장님,
우리는 지금
거룩함의 이름으로 설계된 욕망의 구조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카리스마라는 빛나는 언어 뒤에서
생각하지 않는 믿음,
물어보지 않는 신앙,
비판하지 않는 공동체
를 낳고 있다.

진짜 영적 지도자는
신비한 말보다
공감과 질문을 허용하는 사람,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려 깊은 촉진자여야 한다.

예수는 스스로를 왕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무리를 먹였고,
병든 자를 만졌고,
무대 아래에서 길 위를 걸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분의 뒷모습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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