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늘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다.
공정한 기회, 평등한 기회, 더 많은 기회.
하지만 그 기회는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기회의 문 앞에 선 사람들의 출발선은 정말 같았는가?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교묘한 자기기만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진실은 간명하다.
기회란 그 자체로 평등하지 않다.
기회는 언제나 구조에 의존하며,
그 구조가 공고할수록 불평등은 강화된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언어의 위선
대입제도는 수십 번 바뀌었지만
명문대 입학생의 상당수는 여전히 강남 출신이다.
고시, 로스쿨, 임용고시의 문은 열려 있지만
준비할 시간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다.
“열심히 하면 기회는 온다”는 말은
정말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잔인한 말이 될 수 있다.
기회가 아니라 시간과 돈, 정보와 인맥이 작동하는 구조에서
기회라는 단어는 무책임한 위로가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여전히
“우리는 공정한 기회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은 안다.
기회가 평등하다는 말보다
구조가 불평등하다는 현실이 더 정확하다는 것.
구조를 말하지 않는 정치가 만든 착시
구조는 말하기 어렵고, 바꾸기 더 어렵다.
그래서 정치는 구조를 회피하고,
그 회피를 “기회 제공”이라는 언어로 포장한다.
고용 불평등을 말할 때
정부는 고용률이 아니라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말해야 한다.
부동산 불평등을 말할 때
정부는 청약 제도보다 자산격차와 조세구조를 이야기해야 한다.
교육 개혁을 말할 때
정시/수시 논쟁보다 가정의 문화자본과 지역 교육 격차를 직시해야 한다.
구조를 언급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항상 기회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기회를 말하는 것은 쉽고,
기회의 실패는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를 바꾸는 정치만이 진짜 희망을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회의 평등을 말하면서도
“결국 구조의 문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기회는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행정수도 이전, 교육 균형, 지역 분권이라는
‘기회의 토대’를 바꾸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시도를 계승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
“우리는 문을 열어두었다”는 변명 뒤에 숨고 있는가?
국민은 기회보다
기회의 전제를 묻는다.
기회를 줄게, 열심히 해봐…
그 말보다 먼저,
왜 누군가는 그 문 앞에까지 오지 못했는지를
묻는 정치가 필요하다.
구조를 바꾸는 정치만이
기회의 정의를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