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미덕’에서 ‘비가시적 노동’으로가부장제 유산 속의 한국 여성

한국 여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떠올리는 단어들이 있다. ‘순종’, ‘희생’, 그리고 ‘인내’. 이러한 개념들은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덧씌워져 왔다. 하지만 그 미덕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있던 것은 사실상 철저히 비가시화된 노동, 인정받지 못한 희생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이야기할 때,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가부장제는 가장 큰 구조적 배경이다. 유교 문화는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강조하며 아버지, 남편, 아들에 이르기까지 평생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윤리적 틀을 제공했다. 이렇게 길들여진 여성의 순종은 개인의 성격이나 미덕을 넘어 가족과 사회의 안정이라는 명목 아래 제도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여성들은 ‘현모양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또다시 사회적 역할을 강요받았다. 당시 식민지 권력과 조선 지식인들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현명하게 양육하는 존재로 축소했다. 일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들을 가정이라는 작은 울타리에 묶어두며 저항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동시에 국가 발전의 도구로 이용했다.

산업화 시기 여성의 위치는 다시 변화했다. 한국이 고속 성장과 근대화의 길을 걷는 동안 여성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섬유공장, 전자공장에선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지만, 사회는 이들의 노동을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의 노동은 국가 경제성장의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렀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 여성들이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늘 ‘비가시적’이라는 점이었다. 여성들은 집에서의 가사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교육받았고, 공장에서의 노동은 값싼 임금으로 폄하되었다. 이중의 비가시성은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동안 가려졌던 여성의 삶과 노동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순종의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들의 삶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비가시적 노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재평가해야 한다.

여성의 역사는 곧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들의 삶을 직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이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시작이다. 숨겨진 노동과 희생을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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