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지 않았다.
부활의 첫 목격자는 여인이었고,
예수의 가장 가난한 친구는 마르다와 마리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름을 따르는 수많은 교회 안에서
여성은 오히려 순종을 강요받고, 침묵을 배워야 했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오랜 세월 여성에게
‘순종’과 ‘헌신’, ‘섬김’을 미덕으로 가르쳐왔다.
그것은 성경의 뜻이라기보다,
남성 중심의 질서와 권위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교리의 외피’였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 구절은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되 자기 몸같이 하라”는 다음 구절은 자주 생략되었다.
말씀이 생명이 아니라 통제의 도구가 되는 순간,
교회는 예수의 몸이 아니라 가부장의 성채가 되었다.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여성들은
가난했고, 억눌렸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교회의 성장으로 수렴되었고,
그들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강단 뒤를 지탱했다.
여성들은 주방에서, 주일학교에서, 예배당 구석에서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신했지만
그들이 단상에 서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여자는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는 보수적 해석은
성령의 부르심조차 ‘성 역할’의 이름으로 제지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유리천장이 있었다.
단순히 목사직의 금지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공기’ 속에서 여성이
언제나 리더가 아닌 ‘도움이 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교회 밖에서도 그 영향은 컸다.
‘신앙 좋은 여인’의 기준은
참고, 순종하고, 참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성장은 곧 자기 억제였고,
그녀의 거룩은 곧 자기 소멸이었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보수 개신교가 형성한 여성상은
가부장적 국가주의와 손잡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 젠더 권리, 성평등 담론은
‘가정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혔고,
여성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자, 동시에 통제되어야 할 존재로 격하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를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들이 믿은 예수는 침묵을 강요했는가?
그들이 따르는 복음은 여성의 자기실현을 죄악시했는가?
이제는 ‘교회 안의 유리천장’을 깨야 할 때다.
그리고 ‘교회 밖의 성역할 고착화’를 걷어내야 할 때다.
복음이 가리킨 십자가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억눌린 자의 고통을 대신 지는 사랑의 짐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순종의 미덕으로 침묵하는 여인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로 신을 향해 질문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여성을 말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십자가 아래의 여성들이
침묵이 아니라 말로,
헌신이 아니라 권리로,
섬김이 아니라 연대로
복음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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