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넘쳐나고,
예배는 요란하다.
“주여 삼창”이 울려 퍼지고,
시끄러운 방언이 성도들 사이를 진동한다.
통성기도의 웅성거림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들려주기 위한 증명처럼 들릴 때,
문득 생각한다.
그 분이 계셨다면, 과연 여기에 계셨을까?
나는 소위 “방언의 은사”라는 것에 깊은 의문을 가져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되풀이되는 단어들,
감정이 고조될수록 커지는 음성.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께 더 잘 들리는 기도일까?
혹은 그 요란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고,
서로를 재단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신앙적 퍼포먼스’의 합창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복음서를 다시 펴본다.
예수는 소리 높여 외치기보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났고,
성전이 아니라 우물가와 들판에서 진리를 말했다.
성대한 예배보다
헐벗은 자의 고통에 기울이는 귀가 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기도보다 정치에 열심이고
예배보다 동원에 능하며
헌신보다 ‘집회 인원’에 집착한다.
그 중심에는 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
스피커를 찢을 듯한 찬양,
감정을 흔드는 선포가 있다.
그리고 예수는 그 가운데 점점 불편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금 교회가 말하는 성공과 축복의 논리를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 곁에 서지 않았고,
부자에게 회개를 요구했으며,
제도보다 사람을 우선시했으니까.
예수 없는 기독교.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기도는 있지만,
그 기도가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복, 내 안위, 내 성공을 향한다면
그건 예수의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런데 너무 적게 움직인다.
너무 많은 찬송을 부른다.
그러나 너무 적게 품는다.
너무 자주 “주여”를 부른다.
하지만 너무 적게 예수를 닮는다.
정말로 믿는다면,
그 믿음은
누군가를 향한 연민과
불편한 진실 앞의 용기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그 믿음은,
고개 숙여 씻어주는 손으로,
침묵 속에서 들어주는 귀로,
끝까지 책임지는 말로 증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요즘 종종 이렇게 묻는다.
“예수는 지금,
정말 교회 안에 계신 걸까?”
그리고 대답 대신,
그분이
성전이 아닌 골목에,
장엄한 강단이 아니라 병상 옆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닌
작은 한숨 속에 계시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믿음이란,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그 오랜 진리를
우리는 언제 다시 기억하게 될까.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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