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청년은 과거 어떤 세대보다 많은 걸 가지고 있다.
정보, 학력, 언어능력, 글로벌 감각, 기술 친화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을 “희망이 사라진 세대”라 부른다.
왜일까.
그들이 게으르거나,
민감하거나,
책임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청년이 분노하는 이유는,
정치가 청년을 대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정치적 언어가
사실은 기성세대의 자기면피용 수사였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청년 정책”이라는 이름의 기만
정치는 늘 “청년을 위하겠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 말은 대개 선거 직전,
혹은 지지율이 급락할 때만 등장한다.
청년 주거 정책은 몇 개월짜리 전월세 보증금 대출에 그쳤고,
청년 일자리 대책은 단기 알바 수준의 일시적 숫자 메우기였다.
청년 참여 확대는 청년보좌관, 청년특보, 청년청 설치로 끝났다.
청년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정치의 장식품으로 소비되었다.
청년은 분노하지 않는다, 단지 철수한다
청년은 더 이상 정당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리에 나서지도 않는다.
그들은 투표소에서 등을 돌리거나,
아예 침묵으로 정치에 무관심해진다.
이는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실패가 낳은 감정적 결과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은 신뢰를 잃었고
“정치는 다 거기서 거기다”는 체념은
지금 이 나라의 20~30대를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가 되었다.
청년을 위한 정치는 숫자가 아니라 설계여야 한다
청년을 위한 정치란,
단순히 청년 수혜 정책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구조와 전망을 바꾸는 일이다.
주거 문제는 1인가구와 소득구조를 반영한 주택 재설계로,
일자리 문제는 디지털노동과 플랫폼경제에 대한 사회안전망으로,
교육은 단순 스펙이 아닌 생애주기형 재교육 정책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이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정책의 설계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재배분하는 것이다.
청년이 분노한다면
그건 아직 정치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진짜 위기는
청년이 침묵할 때,
정치에서 철수할 때,
그리고 기대를 버릴 때 시작된다.
정치가 청년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청년의 삶을 살아봐야 한다.
그것이 진짜 대표성과
미래를 위한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