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오랜 세월 ‘믿음은 의심 없는 확신’이라 가르쳐왔다.
질문은 회의로, 회의는 불신으로,
불신은 ‘사탄의 틈’으로 번역되어왔다.
그 결과, 성경공부는 묻는 시간이 아닌, 받아 적는 시간이 되었고
예배는 해석이 아니라 수용의 의식이 되었다.
“질문하지 마세요. 순종하세요.”
“하나님 뜻이니 그냥 믿으세요.”
“그건 신앙이 깊어지면 알게 됩니다.”
이런 말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보다 먼저 배운 어휘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아니, 질문해선 안 된다고 훈련받았다.
질문 없는 믿음은 사유 없는 신앙이며,
사유 없는 신앙은 결국 권위에 기대는 종속이 됩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도,
깊은 신앙을 일군 본회퍼도,
그리고 복음서 속 제자들조차
끊임없이 묻고, 회의하며, 흔들렸다.
믿음은 의심의 반대말이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유의 여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질문하는 교인’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교회의 교리,
목사의 권위,
성장의 논리,
그리고 축복이라는 상품 포장에
작은 틈을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묻는 사람은 성가시다.
대형 교회에서는 위험하다.
질문은 시간과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성경은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이 일을 맡기시나이까.”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교회가 묻지 않는 공간이 될 때,
그곳은 더 이상 ‘살아있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스피커이며,
권위에 순종하는 군대이고,
침묵이 미덕이 되는 폐쇄적 장치일 뿐이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건
질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한 질문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공동체가
진짜 교회여야 하지 않을까.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공동체는
진실도, 변화도, 치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다시
‘묻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늘
묻는 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누가 제 이웃입니까?”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는 대답보다 질문으로 말씀하셨다.
질문을 꺼리고, 질문하는 이를 불편해한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설명이 되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질문’을 금기시한 순간부터
그 믿음은 더 이상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물이 되어버렸다.
예수는 질문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질문을 위험하다 여긴다.
그 차이가 바로,
예수와 교회 사이에 놓인 오늘의 거리다.
우리는 묻는 용기를 회복해야 한다.
신을 향해, 신앙을 향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향해.
그때 비로소,
믿음은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고백이 된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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