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확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확신에 중독된 시대다.
사실보다 감정이 빠르고, 증거보다 확신이 우선되는 시대.
이런 흐름 속에서 대중은 점점 더 단호한 말, 극단적인 목소리, 명료한 구도에 끌린다.
왜일까?
왜 사람들은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더욱더 선명한 극단으로 미끄러지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미디어 분석이나 사회 현상 진단을 넘어,
우리 내면의 심리와 존재의 불안을 정조준한다.
확신은 생각을 멈추게 한다
확신은 달콤하다.
그것은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자르고, 고통스러운 모호함을 일거에 제거해준다.
대중은 이 ‘단순화된 세계’ 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확신은 통찰이 아니다.
통찰은 복잡성을 통과한 후에 도달하는 진실이지만,
확신은 복잡성을 거부한 채 닫아버린 문이다.
그러므로 확신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감정의 피난처가 되기 쉽다.
왜 대중은 그 검을 쥐는가
극단은 항상 양날의 검이다.
누구든 쉽게 쥘 수 있고, 누구든 쉽게 다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검을 기꺼이 손에 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극단의 언어는 “이것이 옳다, 저것은 틀렸다“라는 이분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이보다 더 시원한 답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정작 그 검은 자신도 베고, 타인도 베는 칼이다.
그리고 베일수록,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이 고통은 정당하다”고 느끼며 자신의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확신은 그렇게 증오로 바뀌고,
믿음은 그렇게 무기가 된다.
확신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 우리는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보들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누가 더 확신에 차 있는가?”보다는
“누가 더 질문을 멈추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확신은 말의 종점이지만,
질문은 생각의 시작이다.
사유는 확신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탄생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확신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