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한 그릇에 담긴 애틋한 기록

그뿐이 아니었다. 간단한 콩나물국을 끓이더라도 레시피를 보고 따라 해보았지만 다시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부엌에 들어서면 언제나 천길 벼랑이 앞을 가로막았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p.11

 

제자 중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운 이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맛있는 음식은 마음으로 만들어진다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재료와 소통해야 한다. 화를 내면 음식도 화를 낸다. 짜증난 상태에서 만든 음식은 짜다. 오늘 아침에 부엌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나 보다. 몰입해서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나물을 무쳤다.
–p.28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힘들고 지친 날에는 생명을 약탈해야 살아갈 수 있는 잡식성 동물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자.
–p.36

 

뭔가 찜찜해서 내놓기 전에 맛을 보았다. 왜 이렇게 ‘간지’가 안 나는 걸까? 밍밍해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소금이나 간장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둘러보니 청양고추를 썰어놓고 빠뜨렸다. 어쩌나? 다 볶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잘게 썰어둔 청양고추 세 개를 넣고 잡채를 다시 비볐다.
“맵지 않은 청양고추도 좀 넣었어. 어때?”
“으악! 너무 매워. 도대체 그 맵지 않은 청양고추를 얼마나 넣었어?”
“큰 거 세 개.”
울면서 얼음물을 마시며 잡채를 먹었다.
‘아까는 왜 전혀 냄새를 피우지 않았을까? 저것들이. 나를 골리려고 작정을 했어.’
무지무지하게 매웠지만 간지는 디따 난다. 무염이라는 밍밍함을 이기는 매운맛에 눈물을 뿌리며 정신없이 먹었다.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나도.
–p.40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리던 얼굴을 만나면 얼마나 행복할까.
–p.67

 

“요리는 좋은 재료를 고르러 다녀야 하고, 재료를 잘 다듬어야 하고, 적당한 조리 도구를 사용해서 불을 맞추고 순서에 따라 마음 써가며 음식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설거지와 재료 남은 것들 갈무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구요. 이걸 해보니까 손가락이 욱신거리고 살갗이 아파서 잠을 못 자겠던데요. 게으른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좋아하겠어요?”
–p.74

 

돔베국수를 먹으며 제주도 바닷가의 그 눈부신 오후를 떠올린다. 다시 가볼 수 있을까? 먹을거리를 내놓다 보면 젓가락질만 봐도 마음을 안다. 이미 공간 이동한 뒤일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돔베국수는 국물 맛부터 특별하다. 돼지고기 국물에서 기름기를 거의 완전히 제거한 맛이다. 담백하고 깊다. 향도 좋고. 그건 고기도 마찬가지다. 된장 맛이 조금 배고 잡내가 없어서 달콤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특별한 맛이 기억 속의 장소와 어우러져 기적을 일으킨다.
–p.81

 

완화 병동에 들어섰을 때부터 내 마음은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당장 고통스러운 것만 아니라면, 아니 혹시 조금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먹고 싶은 것은 뭐든’ 먹게 해주겠다고.
투병을 위한 음식은 먹는 것부터 고통스러웠다. 무염 무당이라니! 그리고 동물성 식품은 모두 금지하다니! 먹을 것도 별로 없고, 맛도 없다. 그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조금씩 먹어야 하는 고통은 말도 못하게 컸다.
–p.124

 

아직 초보자라 한꺼번에 두세 가지 음식을 만들지 못한다. 한번에 한 종류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메뉴를 원하는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다 같이 먹게 해본 적은 없다. 아내가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아들이 먹을 수 있게 해주고, 내가 먹고(또는 생략하고). 그동안 그랬다.
–p.133

 

언제부턴가 내 스마트폰이 내 지문을 거부했다. 엄지손가락을 아무리 ‘잘’ 가져다 대어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패턴으로 문을 열었지만 도대체 이유를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엌일을 좀 한다고 지문이 지워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p.140

 

나박김치와 해삼탕을 쟁반에 담아 가져다주었다. 요즘은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보지 않고 가져다준다. 글쎄, 꼭 자신감 때문은 아닌데, 언제부턴가 그런다. 그러고 나서 긴장한다. 맛있을까? 잘 먹을까? 조금 떨어져서 먹는 걸 지켜본다.
“세상에, 너무 맛있어!”
그 말에 온몸이 풀어진다.
–p.157

 

혼자서 맛있는 밥을 느긋하게 먹는 일은 드물다. 대개는 서서 얼른 허기를 채운다. 전에는 라면을 끓여 퍼뜩 먹었다. 물을 넉넉히 붓는다. 끓으면 스프, 당면 조금, 라면, 떡을 넣는다. 적당한 때에 달걀을 하나 넣는다. 반찬은 김치. 가끔 땅콩조림이나 매실장아찌를 곁들이기도 했지만. 대파를 썰어 넣는다거나 ‘그런 짓’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요즘은 혼자 먹을 음식에도 도마와 칼을 쓴다. 대패삼겹살 덮밥 같은 것을 해먹기도 한다.
–p.167

 

주스를 다 만들고 마음이 언짢다. 담아서 가져다줄 예쁜 병이 없다. 온 집 안을 뒤져 보았지만 없다. 어쩔 수 없이 미운 병에 담았다.
내일은 집에서 좀 일찍 나서서 꼭 사야겠다. 이놈의 건망증… 스마트폰을 찾으러 다녔다. 도대체 어디 있는지… 겨우 찾아서 메모를 했다.
‘작고 예쁜 유리병 세 개.’
그 글자들 위로 아내의 얼굴이 겹친다. 망고 주스를 마실 때 눈가를 스쳐지나가던 순간적인 희열과 반짝임… 얼마 만인가, 고개를 들고 애기처럼 웃었다. 바로 이 맛이야. 살 것 같아.
이 기억도 세월과 함께 바래겠지. 지금 이 아픔과 함께.
–p.197

 

사람은 모두가 한 개의 섬이고 그 사이를 오가는 배가 있다. 연락선이 수시로 떠나긴 하지만 부탁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드물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아예 선착장에 그대로 버려진 것도 눈에 띈다. 서로의 사랑이 비껴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 섭섭하고 미워서 화를 내고 떠나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니. 그 연락선은 지금도 여전히, 아마도 영원히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참 쓸쓸한 일이다.
–p.227

김현청 / brian@hyuncheong.kim
   –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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