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주의 성채 아래 선 현대인의 자화상
중세 봉건시대의 농노와 21세기 플랫폼 노동자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얼핏 보기에 하늘과 땅, 아날로그와 디지털, 낫과 스마트폰만큼이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의 영토 위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플랫폼 경제 시대는, 디지털의 껍데기를 쓴 새로운 봉건제도가 아닐까?
‘성’을 둘러싼 신종 영주들
중세 봉건제는 토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한 체제였다. 영주는 자신의 성 주변 땅을 지배하며 농노를 부렸고, 농노는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지대(地代)’의 형태로 상납했다. 토지 없는 농노는 생존할 수 없었고, 영주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1세기 플랫폼 기업들 역시 자신만의 디지털 토지, 즉 플랫폼(Platform)을 소유한다. 유튜브, 우버, 쿠팡, 아마존, 네이버—이 거대 플랫폼들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활동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를 수수료 형태로 거둬들인다. 누가 콘텐츠를 만들고, 누가 물건을 운송하며, 누가 리뷰를 작성하든 간에 이익은 플랫폼의 영주에게 돌아간다.
이 구조를 일컬어 ‘디지털 지대(rent)’라고 부른다. 플랫폼은 단지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토지’인 플랫폼을 독점하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에서 ‘지대’를 수취하는 영주인 것이다.
노동은 있으나 고용은 없다
중세의 농노는 신분상 자유롭지 못했고, 현대의 플랫폼 노동자는 계약상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정규직이 아니기에 고용보험, 산재보험, 퇴직금, 휴가, 복지—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정말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가? 아니다. 플랫폼이 정한 알고리즘, 평점 시스템, 실시간 모니터링 아래 끊임없이 감시당하며, 퇴출될까 두려워 조용히 복종한다.
이것이야말로 고용 없는 지배, 권리 없는 책임, 자유 없는 자유가 아닌가? 노동자가 아닌 ‘파트너’, ‘크리에이터’, ‘라이더’라는 미화된 명칭 뒤에 감춰진 것은, 디지털 농노의 현실이다.
탈중앙화는 거짓 약속인가?
많은 이들이 플랫폼 경제의 미래를 ‘탈중앙화’, ‘개방성’, ‘참여의 민주화’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현실은 역설적이다. 플랫폼의 거대화는 ‘1등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구조’를 낳았다. 즉,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로 인해 사용자와 자본은 상위 플랫폼에 몰리며,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결국 플랫폼은 시장 참여의 문을 열어둔 듯하지만, 그 안에서의 규칙은 절대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봉건제와 똑같다. 농노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크리에이터와 사용자도 플랫폼의 생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새로운 봉건제, 이를 어찌할 것인가?
현대의 플랫폼 영주들은 세금은 내지 않고, 법의 테두리도 피하며,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은 국경도 초월한다. 페이스북의 가짜뉴스, 아마존의 시장 지배,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모두 사회적 영향을 끼치지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실체 없는 권력이다.
역사적으로 봉건제를 무너뜨린 것은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시민계급의 성장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봉건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 플랫폼 노동자의 권리 보장(디지털 노동법 강화)
- 플랫폼의 공공성 확대(데이터 공유 및 공정성 규제)
- 공공 플랫폼, 혹은 협동조합 기반의 대안적 생태계
이러한 대안 없이는 우리는 중세 농노보다도 더 정교하게 지배당하는 ‘자발적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플랫폼 경제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혁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착취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플랫폼 위의 삶이 과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더 얽매이게 하는가?
역사는 말한다. 봉건은 언제나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그 종말은 우연이 아니라, 시민의 각성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이 시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플랫폼의 농노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공화국의 시민이 될 것인가?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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