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死後) 02] 존재는 지각될 때만 살아있다조지 버클리와 관념론이 그려낸 사후 세계의 심상

[사후(死後) 02] 존재는 지각될 때만 살아있다<span style='font-size:18px;display: block; margin-top: 14px;'>조지 버클리와 관념론이 그려낸 사후 세계의 심상</span>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확신이 없는 가운데, 우리는 말한다.
“거기 있나요?”
이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존재가 ‘거기 있음’을 인식하고 싶고, 인식되기를 바란다.

조지 버클리는 이를 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Esse est percipi.”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뜻이다.

버클리의 관념론은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는 물질이라는 실체를 부정했다.
인간이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지각’이며,
지각이 멈추면 존재도 중단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이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우리는 존재할 수 있을까?”

버클리는 인간의 지각이 사라지는 죽음의 순간에도,
신의 지각은 멈추지 않는다고 믿었다.
즉, 인간은 ‘신의 인식’ 안에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육체는 사라져도, 의식은 ‘지각되고 있는 한’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단지 관념론자의 추론이 아니다.
그가 말한 신의 지각은, 일종의 궁극적 기억,
혹은 우주의 의식적 기반을 가리킨다.

우리는 종종 사라진 사람을 기억 속에 붙잡고 있다.
이름을 부르고, 목소리를 떠올리고, 체온을 상상하며
그 사람을 되살린다.
이 또한 하나의 ‘지각’ 행위이며,
사라진 존재를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후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몸이 멈춘 이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신의 인식 속에,
혹은 내가 평생 믿어왔던 우주의 질서 속에서
계속 지각되는 상태,
다시 말해 ‘존재가 계속 이어지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사후 세계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믿고 상상해온 세계 속에서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지각되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조지 버클리의 관념론은,
사후 세계를 단지 신비한 영역이 아니라
지각과 믿음의 연속성 속에 놓인 존재의 확장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는 죽음 이후를 미지의 어둠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지각하는 신’이 여전히 깨어 있는 한,
나는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믿음을 철학적으로 구축했다.

이 믿음은 신학과 연결될 수 있고,
동시에 예술과 문학, 기억과 관계, 사랑과 선언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사라진 자들을 다시 노래하는 시인의 문장,
기도 속에 되살아나는 이름,
죽은 이를 그리워하며 조용히 중얼거리는 음성 —
이 모든 행위가 존재를 다시 지각하게 하는 창조적 행위다.

그래서 존재는 지각될 때만 살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지각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나를 지각할 수 있도록 내가 살아가느냐이다.

죽음 이후,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기억 속에, 어떤 의미로 존재할 것인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남긴 말과 표정과 생각의 결들로 구성된다.

지금 내가 품는 이 생각,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
지금 내가 내 안에서 키우는 감정.
이 모든 것이
죽음 이후의 나를 지각하는 방식이 된다.

결국, 나는 지금
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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