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가?예수는 지금, 무엇을 뒤엎고 싶어 할까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예수는,
그저 개인 구원이라는 미시적 사명을 완수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뒤엎고자 했던 것’은 당시 종교 권력과 결탁한 탐욕의 체제였고,
돈이 곧 신이 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예수의 그림자는 지금도 묻는다.

성경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과 권력이 섞인 세상에서
신앙은 어디쯤 존재해야 하는가?

성경은 왜 ‘부(富)’를 경계했는가

성경은 부 자체를 저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탐욕’에 물든 부는 단호하게 경고한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는 말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있으리라.”
그러나 청년은 슬픈 얼굴로 떠났다.
소유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이 말은 우화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비유였다.
부는 곧 권력이고, 안정이고, 영향력이기에
소유한 자는 내려놓기 어렵고,
그 소유는 신앙의 자리에 슬그머니 올라앉는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여기서 ‘재물’은 단지 동전과 지폐가 아니다.
소유, 통제, 우위, 안도감이라는 이름의 신들이다.

신앙은 왜 ‘경제 질서’와 충돌하는가

자본주의는 ‘이윤 극대화’를 본성으로 한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결과를 도출하는 데 집착한다.
그러나 신앙은 ‘희생’과 ‘나눔’, ‘낭비처럼 보이는 자비’를 강조한다.

경제는 계산을 따지고,
신앙은 관계를 세운다.

경제는 능률을 외치고,
신앙은 눈물의 속도를 따라간다.

성경은 오히려 경제적 논리를 자주 비틀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처럼,
같은 하루를 살지 않았는데도 모두 같은 삯을 받는다.
이는 시장경제의 룰로 보면 불공정하다.
그러나 예수는 말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느냐?
너는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한 것이냐?”

신앙은 공정이 아닌 은혜의 논리를 따른다.
그래서 경제 질서와의 충돌은 필연이다.

한국 교회는 자본주의와 어떻게 야합했는가

한국 교회는 산업화 이후
부흥과 성장, 규모와 영향력의 언어를
너무 쉽게 자본주의의 언어로 번역해버렸다.

“큰 교회 = 축복받은 교회”
“많이 모이면 은혜다”
“기복은 구원이 아니다”라 말하면서도,
실제론 모두가 ‘복’을 사는 마음으로 예배에 들어섰다.

‘축복’이라는 이름 아래
건물은 높아지고, 예배는 화려해지고,
설교는 ‘동기부여 강연’이 되었고,
십자가는 브랜드 마크가 되었다.

예수는 성전을 둘러엎었지만,
오늘의 교회는 마치 그 overturned된 자리를
다시 치워 재건축 중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리지만,
오늘의 일부 목자는 양의 지갑과 인내심을 시험한다.
주일은 안식이 아니라 소비의 하루가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이 아닌 ‘성공’의 이름으로 호출된다.

예수라면 지금, 무엇을 뒤엎을까?

예수는 권위에 굴하지 않았고,
성전의 장사꾼을 향해 분노했고,
나면서부터 소외된 자의 곁에 머물렀다.
그가 지금 이 땅에 다시 온다면,
어느 교회의 헌금함을
조용히 엎을지도 모른다.

기도는 많은데, 사랑은 없고
예배는 요란한데, 정의는 실종된 세상.
예수는 아마도 거기엔 계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오늘날 어떤 질문을 던질까?

“너희는 나를 따르는가?
아니면
나의 이름을 소비하고 있는가?”


기독교인은 여전히 성경을 읽고 듣는다.
그러나 그 말씀을 살아내려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그 예수가 오늘 우리 곁에 온다면
아마 우리가 만든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예수는 지금도 묻고 있다.
“너희가 진짜 섬기는 것은 나인가, 아니면 너희의 평안인가?”

그리고 그 물음 앞에,
오늘의 교회는 대답을 망설인다.

Leave a Reply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