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언제부터 정당을 지지하고, 정책을 홍보하고, 기부금 단체의 얼굴이 되었는가?교회는 누구의 얼굴로 세상에 등장하는가

오늘날 기독교는 더 이상 신앙 공동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회에 있고, 방송국에 있으며, 재계와 법조계, 언론과 문화예술계, 심지어 거리의 시위현장의 청년으로도 얼굴을 바꾼다.

기업인의 논리로 예수를 말하고,
정치인의 어조로 복음을 포장하며,
교사의 권위로 신앙을 주입하고,
예술인의 감성으로 신을 재해석하고,
운동가의 열정으로 신앙을 조직하고,
청년의 분노로 예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계층도,
그 어떤 집단도
예수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저 호도하고, 갈라치기하고,
때로는 이권과 기득권의 욕망을 포장하는 데만 예수를 차용한다.

예수는 언제부터
정당을 지지하고,
정책을 홍보하고,
기부금 단체의 얼굴이 되었는가?

예수는 침묵하는 자들 곁에 있었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그 누구도 대변하지 않았고,
대신 가장 약한 자의 이름으로 자신을 비워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대신 말하려 한다.
무엇을 믿을지, 누구를 찍을지, 어떤 뉴스가 진실인지
심지어 어떤 삶이 축복인지까지 ‘전달’한다.

그 말의 끝에는
언제나 돈과 사람과 표가 따른다.

교회는 복음을 말하는가, 권력을 욕망하는가?
이 물음 앞에
교회는 답하지 않는다.
기도만 요란할 뿐이다.

예수는 대표되지 않는다.
그는 어느 당에도, 어느 재벌에도, 어느 선교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그는 늘 밖에 있었다.
성 밖, 제도 밖, 권력 밖.

그리고 지금도 묻고 있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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