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울음으로 의사를 표시한다.
어릴 아이들과 청소년 기에도 눈물이 많다.
사소한 상처에도 훌쩍이고,
친구의 한마디에도 서운해하고,
슬픈 장면 하나에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눈물은 점점 안으로만 젖는다.
슬픔 앞에서도 무표정해지고,
화가 나도 꾹 눌러 참거나,
아니면 너무 쉽게 폭발한다.
그럴수록 마음은 굳는다.
무릎처럼, 어깨처럼
한 번 굳으면 다시 펴기 힘든
‘감정의 관절’이 굳어가는 것이다.
분노가 먼저, 공감은 나중
어느 날부터인가
화를 참지 못하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거리에서도, 방송에서도, 정치에서도
‘욱’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분노는 빠르다.
생각보다 앞서 나오고,
어느새 언성이 되고, 상처가 된다.
하지만 공감은 느리다.
멈춰 서야 하고, 돌아봐야 하고,
상대의 입장을 상상해야 겨우 도착한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공감보다 분노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다.
빨리 판단하고,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그건 틀렸다”고 말해버린다.
이건 지식의 문제도, 인격의 문제도 아니다.
감정의 유연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건 곧,
마음이 더 이상 ‘펴지지 않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나이든다는 건, 더 사려 깊어지는 일일 수는 없을까
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수록 단단해지고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장 존경받는 어른들은
단단함보다 따뜻함으로 기억된다.
조급하지 않고,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남의 사정을 ‘들어주는 귀’가 있는 사람.
그런 어른은 단단함보다 깊다.
자기 말보다 타인의 말을 많이 기억하고,
사실보다 감정을 먼저 헤아린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몸이 굳어가는 것만 걱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마음의 유연성도 점검해야 한다.
화를 오래 담지 않고,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름을 견디며,
어설픈 말에 웃을 수 있는 사람.
그게 어쩌면,
나이 들어 지혜로운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마음의 유연함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아주 따뜻한 어른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