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성 차별법과 인권의 진보성경적 전통에서 동성애 수용 논쟁을 다시 묻는다

<span style='font-size:18px; display: block; margin-top:0px; margin-bottom:4px;'>포괄적 성 차별법과 인권의 진보</span>성경적 전통에서 동성애 수용 논쟁을 다시 묻는다

기독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서사와 가장 많은 갈등을 남긴 종교 중 하나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서사의 중심에는 구원, 죄, 질서, 복종 같은 개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이 실재로 작동한 자리에는 늘 차별과 배제의 구조가 겹쳐 있었다.

성경에는 분명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창조되었고,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했으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교육되었다. 노예 제도는 존재 그 자체로 용인되었다. 바울은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구약은 전쟁 포로를 소유물처럼 다뤘다. 장애인은 공동체 제의에 참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나병환자는 성 밖으로 격리되었다.

이 모든 명령과 규범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도 여성을 침묵시키고, 장애인을 격리하고, 노예제를 유지하며, 인종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시대는 바뀌었다.

하지만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는 죄이며 인간 타락의 극치”라는 말이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질 때마다, 많은 이들이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성모독이 아닐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존엄을 가장 먼저 훼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언어들이다.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통은 단순히 사회적 편견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신앙 공동체에서 자라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선고를 받는다. 이보다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사회는 먼저 그들의 아픔을 들여다볼 용기가 있는가.

누군가에게 성정체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진, 설명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다. “왜 그렇게 태어났느냐”고 묻는 것은 “왜 네 눈동자는 그런 색이냐”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성소수자 청년들을 만나는 이들은 그들의 눈에서 깊은 외로움을 본다. 가족에게도, 교회에게도, 사회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의 무게를. 그들은 자신을 “고치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깨달았다. 이것은 고쳐야 할 병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진리는 불변해도, 해석은 역사적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이성과 경험이 신 중심의 세계관을 흔들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교권을 해체했고, 계몽주의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사상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철학은 신을 문제 삼기보다 인간의 존엄과 주체성을 중심에 두기 시작했고,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예 해방, 여성 참정권, 장애인 권리법, 인종차별 철폐 등이 제도화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에서 기독교는 초기에 ‘반대’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남부 교회는 노예제를 지지했고, 여성 안수는 “질서의 붕괴”로 간주되었으며, 유색 인종의 동등한 권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위배된다”고 주장되었다.

그리고 이제, 동성애와 성소수자의 권리가 그 다음 자리에 있다.

 

교회는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가

교회는 늘 “성경적 질서”를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해왔다. 여성은 교회를 인도할 수 없고, 흑인은 백인과 동등하지 않으며, 장애인은 제의에서 배제되며, 동성애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는 질문을 바꾸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 해석은 누구의 이해에 기반했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삭제되어 있었는가?”

결국 여성도, 흑인도, 장애인도, 법과 제도 안에서 존엄한 주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때 교회가 반대했던 바로 그 권리들이 이제는 상식이 되었고, 도리어 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사회적 죄로 간주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동성애를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죄”로 규정하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주장은 과연 미래의 역사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곧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되어왔다

페미니즘이 교회에 유입되었을 때, 여성 안수에 대한 두려움이 제기되었고, 실제로 여성 안수가 확산되자 이번에는 동성애자 목사 안수에 대한 공포가 대체되었다. 이 흐름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통로를 따라 연속된 것이다.

여성의 안수가 논의될 때마다 “질서의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여성의 권리가 확장될 때, 그 다음은 동성애가 아니냐는 불안이 뒤따랐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적으로 증명한다. 한때 금기였던 것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권리로 자리 잡는 과정을.

노예 해방이 논의될 때, 남부의 교회들은 “성경적 질서”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여성 참정권이 제기될 때, “가정의 파괴”를 우려했다. 장애인 차별 금지가 논의될 때, “현실적 어려움”을 들었다. 그러나 결국 인류는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와 해석, 인간 이해의 진보에 대한 저항이며, 종교가 윤리적 주체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이기도 하다.

역사는 인류에게 묻는다. 오늘 거부하는 “다름”은 내일의 “당연함”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차별의 논리는 언제나 익숙함과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과 사랑, 평등이라는 가치 앞에서 사회는 늘 새로운 시선과 실천의 용기를 요구받는다.

물론 모든 시대에 진리는 도전받는다. 그러나 도전받는 진리 중 ‘사랑’과 ‘존엄’을 거부하는 해석은 결국 무너졌다. 여성도, 흑인도, 장애인도, 언젠가는 동성애자도. 교회는 결국 그들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품지 않는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안에는 여성, 노예, 장애인, 인종에 대한 차별이 명확히 존재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이후, 인간의 존엄을 중심으로 해석이 전환되며 차별은 제도적으로 해소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동성애에 대한 수용도 같은 궤도 위에 있으며, 현재 교회의 반대는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존엄과 사랑을 거부한 해석을 넘어서며, 교회 또한 그렇게 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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