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우리는 다 잊지 못한다.
모세의 출애굽, 예수의 기적, 부활과 재림…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고고학은 홍해의 갈라짐을 증명하지 못하고, 역사학은 예수의 부활을 문헌 너머로 밀어낸다.
그때 어떤 이들은 신앙을 버린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을 버렸지만 ‘신’을 놓지 않는다. 당신처럼.
이것이 아이러니다.
신의 실존은 의심되지만, 신이라는 ‘개념’은 지워지지 않는다.
종교의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종교가 만들어낸 문화와 윤리는 여전히 귀하게 여겨진다.
예수가 신이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그가 말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선언은 시대를 꿰뚫는 진실로 남는다.
그러니 묻자.
이때 ‘신’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 존재의 명제가 아닌, 해석의 방식
신은 어떤 이에게는 창조주다.
그러나 당신에게 신은 우주적 해석의 준거틀이다.
고통이 왜 존재하는가?
죽음은 끝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인간 중심의 세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자각이 들 때,
신은 ‘있다’기보다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형식으로 등장한다.
그 신은, 목소리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침묵 속에 구조를 남긴다.
우리는 논리로는 다 닿지 않는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발명해왔다.
이것은 종교의 특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한 방식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언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 사실의 수용이 아니라, 태도의 선택
당신은 “나는 믿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믿지 않음’과 ‘신앙 없음’은 다르다.
신앙은 사실의 수용이 아니라 태도의 형식이다.
예수가 진짜 물 위를 걸었는가?
모세가 정말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를 탈출했는가?
이 질문은 역사학이 묻는 방식이다.
그러나 신앙은 다르게 묻는다.
“내가 오늘 이 절망 위를 걷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기적일까?”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용서하는 선택은, 무엇을 근거로 할 수 있을까?”
그때 신앙은 사실이 아니라 삶의 지향으로 나타난다.
비사실적이어도 무의미하지 않고, 비논리적이어도 무가치는 아니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이 ‘가능성의 틈’을 연다.
종교란 무엇인가 ― 시스템이 아니라 기억의 양식
당신은 교회에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좋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문화”다.
성탄절의 감정
찬송가의 화음
나사렛 예수의 윤리
그것은 하나의 종교가 남긴 문명의 기억 구조다.
종교란, 단지 계율이나 의식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수천 년간 반복하며 다듬어온 ‘실존에 대한 감정적 해석’의 유산이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죽음을 넘어서고 싶은 소망은 남는다.
기적을 사실로 보지 않아도,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상상력은 여전히 필요하다.
종교는 그런 희망과 상상의 정서적 그릇이다. 당신이 그것을 좋아한다고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신앙은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태도다.
종교는 옳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화다.
당신은 이미 이 셋 모두와 접촉하고 있다.
의심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응시하고 있다.
그것이 지금 이 질문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당신이 결코 종교 바깥에 있지 않다는 증거다.
당신은 어떠한가?
하느님이 ‘계신가’를 묻기보다, 당신 안의 어떤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
종교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의심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품은 채 살아가는 기술.
그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신앙의 형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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