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와 부성애첫사랑은 두 번 온다

몽골에 사는 친구가 딸아이 사진을 올렸다.
“이제 막 아내를 좀 알겠다 싶은데, 이 작은 ‘여자 사람’을 이해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농담 반, 진심 반이었다.
그 한마디에 그의 앞으로 20년이 살짝 그려졌다.
배우자를 알아가는 일, 아이를 알아가는 일.
관계의 시작과 또 다른 시작이다.

“남자의 첫사랑은 딸이고, 여자의 첫사랑은 아들이다.”
나는 늘 그렇다고 생각한다.
법칙이 아니라 상징, 통계가 아니라 체감이다.
아버지는 딸 앞에서 보호본능과 허술함이 함께 나오고,
어머니는 아들 앞에서 강단과 부드러움이 같이 나온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 때문에 더 서툴러지는 모습이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생각해보면, 관계는 원래 대칭이 아니다.
아내를 이해하는 건 ‘타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고,
딸을 이해하는 건 ‘말 없는 신호를 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전자는 대화를 통한 조율이라면, 후자는 눈빛과 표정으로 하는 번역에 가깝다.

또, 애착은 단순하지 않다.
‘딸바보’나 ‘아들바라기’ 같은 말이 유행하지만,
현실은 훨씬 다양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더 깊이 가까운 집도 있고,
어머니와 딸이 삶의 결을 공유하는 집도 있다.
그래서 이 글이 말하는 건 규칙이 아니라 은유다.
상징은 언제나 예외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친구의 질문은 시간의 문제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
아내를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화의 횟수로 가늠할 수 있지만,
아이를 알아가는 데는 그 아이가 커가는 시간만큼이 필요하다.
말을 배우고, 고집을 부리고, 틀렸다가 다시 배우는 동안
부모도 함께 자란다.
그래서 답은 간단하다. 평생.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끝을 보는 게 아니라, 평생 조금씩 가까워지는 일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알아가고 있는가.
배우자의 오래된 침묵, 자녀의 갑작스러운 반항, 부모의 느려진 걸음.
관계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오늘도 두 번의 첫사랑을 새롭게 시작한다.
한 번은 어른으로서, 또 한 번은 초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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