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가보는 사람이 있다.
희망도 절망도 반쯤 남긴 채 머무르지 못하고, 꼭 끝장까지 가서야 멈춘다.
희로애락의 감정도, 사랑과 증오의 마음도,
어쩌다 생긴 욕망 하나에도
극단을 향한 본능이 깃들어 있다.
한자어 ‘극(極)’은 “다함”, “끝남”을 뜻한다.
극락(極樂)도 극형(極刑)도, 끝을 지나서야 드러나는 세계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은 왜, 끝장을 보아야 비로소 스스로를 깨닫는가.
“만추지야(滿酬之夜)”라는 말이 있다.
가득 찬 보답의 밤.
감정과 행위, 혹은 대가가 극점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그 밤은 대체로 고요하지 않다.
술로 흘러넘치거나, 눈물로 채워지거나, 혹은 비명을 안고 무너진다.
고대 중국의 맹자도 말했다.
“過猶不及(과유불급)” —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하지만 세상은 맹자의 말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모자라서 무너지기보다,
넘쳐서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우리 안의 무의식은 ‘가득함’을 견디지 못한다.
가득 찬 사랑은 질투가 되고,
가득 찬 열정은 번아웃으로 번지며,
가득 찬 권력은 필연적으로 오만으로 기운다.
이 모든 건 단지 ‘욕망이 과해서’가 아니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파국을 향한 충동’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이 욕망을 ‘죽음 충동(Thanatos)’이라 불렀다.
모든 에너지는 결국 자기 파괴로 수렴된다는 주장.
우리는 자주, 어떤 형태로든 파멸을 꿈꾼다.
그것이 해방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차인 후,
단숨에 18kg을 빼고, 회사도 그만두었다.
이별의 끝, 몸의 끝, 관계의 끝을 동시에 경험하며 말했다.
“끝장까지 가보니까 살만하더라.”
그 말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끝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평온.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자의 조용한 숨.
“죽고자 하면 산다(必死則生)” — 『손자병법』.
이 말은 단순한 전술의 지혜가 아니다.
끝을 각오한 자만이 새로운 시작을 마주할 수 있다는 인생의 역설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말의 끝, 관계의 끝, 생각의 끝 —
참지 못해 던지는 ‘끝’이라는 말들이
사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애매한 용기의 대체물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쩌면,
끝이 아니라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극단으로 달려가기 전에
잠시 멈추고, 돌아보고, 되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마주하기 싫어서 이리 달리는가?”
끝에 가서야 깨닫는 것보다,
중간에서 멈춰 사유할 수 있는 사람 —
그 사람이 어쩌면 더 오래 살아남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끝을 봐야 멈춘다.
하지만 진짜 지혜는 끝이 아니라,
중간에서 ‘멈추는 법’을 아는 것이다.
극단이 아닌 균형에서 삶은 비로소 깊어진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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