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바람이 말해주는 것들선함, 계절, 그리고 기다림의 언어

이맘때가 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서늘하지만 거칠지 않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면, 그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누군가는 계절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아침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공기 속에는 명확히 ‘가을’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언제부턴가 성글어진 햇살, 한 박자 늦게 떨어지는 나뭇잎, 툭 던진 인사에도 마음을 싣게 되는 그런 시간.

어떤 질문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거대한 사건이나 웅장한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그저 걷는 길 위로 쏟아지는 낯선 공기 한 줌, 혹은 익숙한 풍경 속에서 문득 발견하는 미묘한 색의 차이처럼. 그런 사소한 감각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질문들은 왠지 모르게 무겁고 깊다. “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거창한 물음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지금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가?”와 같은 아주 사적이고도 본질적인 물음이다.

나는 이 질문들이 어떤 목적지나 정답을 향한 여정이라기보다는, 그저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산책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선함’을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정답처럼 외우려 하지만, 정작 나의 삶에서 선함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 실천적 의미를 묻는 데는 주저한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에서 진정한 사랑은 완벽한 상대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선함 역시 마찬가지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선의 기준을 찾기보다, 불완전하고 모호한 세상에서 나 스스로가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묻는 것. 그것이 선함의 본질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불공정한 구조와 제도 속에서 어떤 이에게는 ‘선함’을 실천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이에게 “왜 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선함은 단순한 개인의 의지나 심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의미를 찾고 확장되어야 한다.

선의 가치는 누가 판단하는가? 당신이 던진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선함은 점수가 아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혹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 행하는 의무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공감과 연민의 발현이다. 내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고, 내가 행한 작은 도움의 손길이 절망 속에 있던 이에게 희망의 불꽃을 지핀다. 그 선의 파동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거대한 힘이 된다.

가을의 초입에서 문득 철학책을 꺼내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선함’이라는 본질적인 물음이 계절의 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 질문은 답을 찾으라는 강요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당신의 삶을 돌아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초대일 것이다. 가을바람이 묻는 것은 결국, 당신의 가치관과 태도를 점검하라는 사려 깊은 권유인 것이다.

오늘 나는 그런 계절 가을을 걷고 있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전해진 이야기처럼. 그래서일까. 선뜻한 바람이 스칠 때면 괜히 누군가가 떠오른다. 오래 앉아 차를 식히며 말이 길어지고, 때때로 침묵이 더 길어지는 자리. 가을은 대화가 그립고 만남이 사무치는 계절이다. 오늘은 안부 한 통을 건네볼까. 그 한마디가, 이 계절의 선함이 머무는 방식일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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