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슬리퍼를 끌고 내려가 편의점 택배 반납을 끝내고, 맞은편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받는다. 공원 벤치에 잠깐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길 건너 약국에서 비타민을 사며 동네 헬스장 등록을 묻는다. 집에 돌아오는 길, 무인 빨래방의 건조기 불빛이 돌아간다. 이 동선이 한 건물의 쇼핑몰이 아니라 동네 전체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슬세권’의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 슬리퍼와 역세권의 합성어. 슬리퍼 차림으로 생활 편의를 해결할 수 있는 권역이라는 뜻. 팬데믹이 근거리 생활을 일상으로 고정시키자, 동네는 응급 편의가 아니라 완결된 생활 무대가 되었다.
슬세권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원격근무가 일터의 좌표를 흐릿하게 만들고, 배달·결제·모빌리티가 ‘마지막 1마일’을 촘촘히 메우면서 동선 자체가 축소되었다. 거대 몰의 집중은 동네의 다핵화로 균열되고, 상권은 반경 중심으로 미세하게 증식한다. 점심시간의 테이크아웃, 주말의 육아 동선, 반려동물의 산책 루트가 중첩되며 동네는 하나의 운영체제처럼 작동한다. 슬세권은 소비의 편의가 아니라 시간의 회수다. 사라지던 틈새 시간을 발굴해 삶의 리듬을 재배치한다.
그러나 편의는 언제나 질문을 동반한다. 가까움은 우리의 관계를 두텁게 하는가, 아니면 더 좁힌 취향의 섬을 만드는가. 동네의 편의가 오르는 순간 임대료도, 교체 주기도 빨라진다. 오래된 서점이 사라지고, 프랜차이즈의 동일한 간판이 들어선다. 배달 플랫폼의 그림자 노동, 야간 소음, 쓰레기의 순환은 누가 감당하는가. 슬세권은 ‘편의의 권리’인 동시에 ‘공공성의 책무’다. 노약자와 돌봄이 필요한 가구에게는 생존 인프라이지만, 무심하면 금세 과열과 배제의 기계가 된다.
나는 슬세권을 도시의 종착점이 아니라 과도기의 언어로 본다. “15분 도시”의 약속이 편의로만 귀결될 때, 우리는 동네를 하나의 쇼핑 목록으로 오해한다. 생활권은 물건의 목록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제3의 공간과 건너 인사를 건네는 관계의 온도로 완성된다. 슬세권의 진짜 가치는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서로를 돌본다’는 감각에 있다. 오늘 저녁, 슬리퍼 차림으로 나서는 발걸음에 무엇을 더할 것인가.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챙기고, 동네 가게의 이름을 외우고, 벤치에 잠깐 앉아 하늘을 본다. 도시의 품격은 거대한 스카이라인이 아니라, 걸어서 닿는 일상의 친절에서 시작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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