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교동의 기와지붕 아래를 걸을 때, 숫자보다 먼저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열두 대, 삼백 년. 사람들은 그 집안을 만석지기라 부른다. 하지만 그 집이 오래 버틴 힘은 창고의 곡식이 아니라, 곡식을 어떻게 쓰고 나눌지 정해 둔 말들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벼슬과 과시를 경계하고, 흉년에 땅을 사지 말고, 길손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방 백리 안 굶는 이가 없게 하라고 가르쳤다. 이른바 ‘육훈’이다. 돈을 모으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부터 정한 규칙. 기준이 먼저였고 재산은 뒤따랐다.
집안의 바깥을 묶는 육훈이 있었다면, 안을 세우는 ‘육연’도 있었다고 전한다. 홀로 있을 때는 맑게, 남과 있을 때는 온화하게, 일이 없을 때는 차분하게,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뜻을 얻어도 담담하게, 잃어도 태연하게. 부가 커지면 태도가 흐트러지기 쉽다. 그들은 먼저 태도를 묶어 두었다. 그래서 재산이 주인을 먹어치우지 못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머문다. 성공은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느냐의 문제라는 사실. 창고의 크기보다 마음의 그릇이 집안을 지킨다는 사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숫자로만 말한다. 재산, 순위, 면적. 그러나 최 부잣집이 남긴 답은 다르다. “얼마나 많이”보다 “어떻게 올바르게.” 흉년에 창고를 열고, 빚 문서를 태우고, 이웃의 굶주림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이 곡식보다 오래 간다. 유산이란 금고의 열쇠가 아니라, 열고 닫을 때의 기준이다. 기준이 유산이 되면, 다음 세대는 실수할 자유는 있어도 타락할 이유는 적어진다. 길이 보이면, 한동안 비바람이 와도 사람은 돌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같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얼마나 벌었느냐”보다 “어떤 방식을 남길 것이냐.” 오늘의 성과표보다 내일의 사용설명서. 아이에게 물려줄 가장 큰 재산은 통장 잔액이 아니라, 잔액을 대하는 습관이다. 성공은 결국 시간 싸움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나는 건 금이 아니라 기준이다. 최 부잣집이 증명했다. 만석보다 오래 남는 것은 길이라는 것을.
최 부잣집의 힘은 창고가 아니라 기준이었다. 돈을 모으기 전에 쓰는 법을 정했고, 부를 자랑하기보다 태도를 묶었다. 유산은 금고의 열쇠가 아니라, 열고 닫는 기준이다. 다음 세대에 남길 질문을 바꾸자.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지침이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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