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쉴 새 없이 우리를 향해 돌을 던진다. 스마트폰 너머의 무책임한 말들, 무례한 운전자의 경적 소리, 나를 오해하는 동료의 눈빛까지. 세상은 우리의 반응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미끼를 문다. 자극이 오면 반응하는 것, 그것이 마치 살아있다는 증명인 것처럼 우리는 즉각적으로 응수하며 감정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하지만 모든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는 삶은, 모든 파도에 흔들리는 조각배와 무엇이 다른가? 그런 배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항구에 닿을 수 있을까?
우리가 무언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일이다. 편도체(amygdala)는 위협을 감지하면 생존을 위해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키고, 이는 수만 년간 인류를 지켜온 방어기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위협’은 생존과 무관한 ‘감정적 자극’이다. SNS의 ‘좋아요’ 개수, 단체 채팅방의 미묘한 분위기, 나를 향한 비판적인 댓글. 이것들은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지만, 우리의 편도체는 여전히 맹수의 습격처럼 요란하게 경보를 울린다. 그 결과 우리는 불필요한 전투에 참전해 귀한 감정의 탄약을 낭비하고 만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시대를 관통해 현대 심리학의 핵심 원리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역시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서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자유와 힘이 있다”는 통찰을 남겼다. 이 ‘공간’을 인지하고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감정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반응하지 않는 것은 무시나 회피, 혹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감정을 보호하고,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위한 의식적이고 성숙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반응하지 않을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 시작은 물리적·심리적 ‘거리두기’를 연습하는 데 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그 자리를 잠시 떠나거나 깊은 심호흡으로 의도적인 틈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편도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잠시의 멈춤이 만든 공간에서, 우리는 관점을 전환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이 일이 1년 뒤에도 나에게 중요할까?’, ‘이 사람의 비난이 과연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이 현명한 질문들은 문제의 크기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하고, 우리를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건져 올린다. 궁극적으로 나의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는지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간과 감정은 한정된 자원이다. 이 소중한 자원을 나를 성장시키는 일이 아닌, 나를 파괴하는 일에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투자는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음에 응답할 의무는 우리에게 없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명료한 답변이고, 무반응이 가장 현명한 대응일 수 있다. 나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자극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자.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자. “이것은 나의 소중한 감정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모든 파도에 흔들리는 배는 항구에 닿을 수 없다. 가장 고요한 힘은 반응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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