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의 공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키보드 소리는 여전히 경쾌하고, 모니터의 불빛은 꺼지지 않으며, 정해진 업무는 마감 시간에 맞춰 완수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단절되었다. 한때 미덕으로 여겨졌던 자발적 야근, 업무 시간 외의 아이디어 제안, 조직을 위해 ‘나’를 기꺼이 갈아 넣던 헌신. 그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증발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역할, 그 이상을 수행하지 않는다. 마음의 사직서를 낸 채, 최소한의 의무만을 수행하는 이 현상을 세상은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 부른다.
기성세대는 이를 나약함, 혹은 책임감의 부재라 힐난한다. ‘요즘 젊은 것들’의 이기주의라며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고요한 저항을 단순히 한 세대의 변덕으로 치부하는 것은, 숲 전체가 병들고 있는데 애꿎은 나뭇잎 하나만 탓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조용한 퇴사’는 게으름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실’이라는 신화는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우리 사회의 낡은 계약서를 향한 가장 예의 바르고도 단호한 파기 선언이다.
‘성실’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종교와도 같았다. 폐허 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세대에게 성실은 생존의 연장이자 성공의 유일한 열쇠였다.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명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였고, 노동은 개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간파했듯, 근면과 성실은 단순한 노동 윤리를 넘어 구원의 약속처럼 작동했다. 이 사회적 계약은 ‘노력하면 계층을 이동할 수 있다’는 희망의 사다리가 존재할 때 비로소 유효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 앞에 놓인 사다리는 썩었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천정부지로 솟은 집값, 제자리걸음인 임금, 불안정한 고용 형태 속에서 성실의 대가는 더 이상 정당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착취의 동의어가 되기 일쑤다. 초과 근무의 보상은 더 많은 책임과 업무량으로 돌아오고, 조직에 대한 헌신은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번아웃’으로 귀결된다. ‘성실’이라는 이름의 제단에 바쳐진 것은 희생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계약은 파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용한 퇴사’는 지극히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다. 그것은 노동의 거부가 아니라, 노동과 삶의 경계를 재설정하려는 필사적인 투쟁이다. 계약서에 명시된 만큼만 일하고, 나의 시간과 감정, 영혼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겠다는 주권 선언이다. 이는 과거 노동자들이 ‘준법투쟁’을 통해 부당함에 저항했던 방식과도 닮아있다.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시스템의 모순을 가장 시끄럽게 고발하는 것이다. 그들은 소리치지 않는 대신, 멈춰 서서 묻는다. “나의 삶은 정말 직장 안에만 있는 것입니까? 이 노동의 끝에 내가 원하는 삶이 정말 존재하기는 합니까?”
결국 ‘조용한 퇴사’는 ‘요즘 애들’의 문제가 아니라, 낡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해법은 그들의 태도를 교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실’이라는 낡은 신화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개인의 무한한 헌신을 요구하며 성장해 온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한 사람의 가치가 오직 직함과 연봉으로만 평가되는 사회는 건강한가? 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조직이 과연 지속 가능할 수 있는가?
이 조용한 질문들이 공론의 장에서 시끄럽게 토론될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 시대의 일과 삶에 대한 새로운 계약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조용한 퇴사는 개인의 나태함이 아닌, 성실의 가치가 더 이상 정당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회 구조에 대한 합리적 저항이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무한 헌신’이 오늘날 ‘번아웃’과 ‘착취’로 귀결되면서, 젊은 세대는 노동과 삶의 경계를 재설정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노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시끄러운 질문이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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