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not now, then when?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문장의 끝에 물음표 하나를 달고 있지만, 이 문장은 질문이 아니라 다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핑곗거리를 일거에 걷어내고 “지금”을 점령하라는 최후통첩이다.

고대 히브리의 랍비 힐렐(Hillel the Elder)은 간결하지만 삶의 정수를 꿰뚫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만약 지금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란 말인가?” 이 물음들은 2천 년의 시간을 건너와 여전히 우리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특히 마지막 질문, ‘지금이 아니면 언제(If not now, when)?’라는 절박한 외침은 미룸과 유예(猶豫)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서늘한 등불과도 같다. 우리는 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식을 ‘다음’이라는 가상의 시간 창고에 쌓아두는 걸까. 시간은 흘렀지만 인간의 핑계는 진화하지 않았다. “지금”은 여전히 불편하고, “나중”은 여전히 달콤하다.

한국어로는 “미루다”라는 세음절의 단어지만, 그 속에는 수백 가지 변명이 들어 있다. “준비가 안 됐다”, “기분이 안 온다”, “날씨가 춤춘다”, “세상이 나를 반길 때까지”….
나는 내 오래된 구글의 카렌다의 할 일 앱을 다시 사용하기로 하고 살펴 보았다. 상당수의 목록에 다만 해가 바뀌었을 뿐, 여전이 남아있었다. 그 사이 세상은 코로나를 겪고, 전쟁 기운이 돌고,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나의 ‘내일’은 여전히 24시간 뒤에만 존재했다. 힐렐이 말한 “when”은 결코 미래에 오지 않는다. 미래는 오직 미래일 뿐, 현재가 될 자격은 없다.

물리학자들은 시간을 ‘t’라는 변수로 쓴다. t는 연속적이고, 미분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t를 끊어 산다. “지금”은 0.1초 단위로 조각나고, 우리는 그 조각들 사이로 도망간다. “이번 주말에”, “이번 달 말에”, “내년에는”…. 문제는 시간이 연속인데, 우리만 끊어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은 늘 조금읪 밀려난다. 어느새 인생은 밀려난 “지금”들의 공터가 돼 버린다. 힐렐은 이 물리적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if not now’라고 말했다. ‘now’는 유일하게 우리가 밀어낼 수 없는 시간의 단면이다.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은 지난주 초였다. 문제는 완벽주의 성향이었다. 뭔가 불만족 스러웠다. 1주일이 지난 주말 저녁 더이상 미루지 말자는 의미로 “If not now, then when?”을 포스트잍에 써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그냥 우선 하기 시작했다. 완성도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두시간여만에 마무리됐다. 기획안을 보내자 매우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힐렐은 미래의 완벽을 기다리지 말라고 했던가. 완벽은 ‘나중’의 허구요, 행동은 ‘지금’의 사실이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 찬 기회의 문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설지, 아니면 문 앞에서 망설이다 다음으로 미룰지는 오롯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미래는 우리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수많은 ‘지금’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집과 같다. 오늘 당신은 어떤 벽돌을 쌓아 올릴 것인가.

If not now, then when—
이 문장은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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