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연기로 한 걸음 더 진화한 ‘뮤지컬의 아이콘’ 김준수

<데스노트> ‘엘’ 역 맡아 흡인력 높은 연기로 진가 재확인

뮤지컬의 아이콘’ 김준수의 공감연기가 화제다. 김준수는 지난 6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뮤지컬 <데스노트>에 어떠한 사건이든 반드시 해결해 내는 세계 최고의 명탐정 ‘엘(L)’ 역으로 출연해 뛰어난 심리묘사와 치밀한 연기력으로 관객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엘(L)’은 어긋난 정의감에 사로잡힌 채 자기만의 신세계를 구축하려는 ‘라이토’(홍광호 분)와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인물. 대담하고 뛰어난 추리력으로 ‘라이토 = 키라’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99% 성공하지만, 데스노트의 룰을 이용한 ‘라이토’의 계략에 빠져 나머지 1%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 ‘엘(L)’은 ‘라이토’의 계획대로 사신 ‘렘’의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히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다.

 

김준수는 이 작품에서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뛰어난 캐릭터 구현력을 보여주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진가를 확인시켰다. 상대와의 팽팽한 두뇌싸움은 현실감 있게 빚어졌고,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연기는 기대를 충족시켰다. 폭발적인 고음에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안정적으로 내뿜는 가창력은 가히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분노와 순수가 함께 담긴 그의 보이스는 ‘엘(L)’이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형상화하며 관객을 전율케 했다. 그의 연기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외려 무대 위에 그림을 그리듯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펑퍼짐한 바지에 어깨까지 축 늘어진 헐렁한 티셔츠, 엉거주춤한 걸음걸이에 잔뜩 헝클어진 헤어스타일, 눈 밑에 짙게 드리워진 다크서클과 사탕을 입에 문 모습은 영락없는 만화 속 ‘엘(L)’ 그 자체였다. 싱크로율 100%의 캐릭터 해석력은 작품에 대한 신뢰도를 한층 높였다. 사실 처음에 김준수가 뮤지컬 <데스노트>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은 그가 당연히 ‘라이토’ 역을 맡을 거라 예상했다. 말쑥한 비주얼과 모범적 이미지가 ‘라이토’ 역에 더 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 ‘완성형 배우’는 대중의 선입견을 과감히 뒤집었다.

 

 

그의 선택은 ‘엘(L)’이었다. 평단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비롭지만 다소 후줄근한 다중적 인물과 김준수는 언뜻 매치가 되지 않는 듯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낯선 조합이었다. 그것은 충돌이었다. 거리가 멀어보였다. 하지만 김준수는 그마저도 편견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는 이 난해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예측 가능한 익숙한 것들을 거부한 그의 변신은 강렬한 임팩트를 일으켰다.

 

김준수는 반전의 매력으로 일반의 예상을 통쾌하게 뒤집고 비틀었다. 그동안 <엘리자벳> <드라큘라> 등의 작품을 통해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컬러로 캐릭터를 투영해왔던 그는 이번에도 개막 직전, 포스터와 뮤직비디오를 통해 과감한 민트색 헤어컬러를 공개하며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그의 역발상은 단박에 신선한 화제를 불러왔다. 이는 고정관념과 답습에 대한 당당하고 속 시원한 제동이었다. 새로움이었다. 그러면서도 대중이 뮤지컬 <데스노트>에 시선을 주목하게 하고, 응집시키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오히려 ‘엘(L)’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으로 이어졌다.

 

그가 이번 작품에서 평단과 관객을 놀라게 한 것은 이처럼 깔끔하고 댄디한 아이돌의 이미지를 벗고, 폐인 스타일의 캐릭터로 깜짝 변신한 비주얼만은 아니었다. 그는 ‘키라 사건’에 개입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추리력으로 키라의 정체를 캐내고, 오직 자신만이 세상의 정의라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라이토’와 치열한 심리전을 벌이는 ‘엘(L)’의 내면을 디테일한 연기로 펼쳐보였다. 무엇보다 뛰어난 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연기력이었다. 그를 통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시대를 둘러싼 비극의 현장이 생생하게 무대에 그려졌다. 김준수의 ‘엘(L)’은 만화나 영화 등 이전의 콘텐츠에서 소비된 ‘엘(L)’과 차원이 달랐다. 그의 입체적 연기는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온몸으로 표현하고,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서야 하는 공간예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작품의 스토리텔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섰다. 그의 연기를 보며 ‘엘(L)’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위에 대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애써 등장인물간의 갈등관계를 이해하거나 드라마구조를 분석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그의 연기는 마치 측정되지 않는 자연의 성질처럼 객석에 다다르고, 인식되었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그의 연기에는 왜곡이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했다. 하지만 이 젊고 영리한 배우는 과도하게 자신(혹은 캐릭터)을 객석에 투사하여 감정적 자극을 범람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섣불리 화려하게 수식하거나 치장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은밀하게 다가서 공감의 접촉을 시도했다. 마치 관객의 마음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내면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속속들이 인지하고 분별하고 계산해 놓은 것 같았다.

 

어느덧 비교불가의 경지에 이른 그의 연기는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마치 꽃의 아름다움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만개한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굳이 그 물리적 현상을 풀이하는 행위가 불필요하듯, 절정에 다다른 그의 연기를 두고 이렇다 할 설명을 단다는 게 부자연스럽다. 그저 관객은 머리로 해석하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고,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상황에 동화되면 되었다. 이 모든 게 김준수의 감성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연기가 놀라운 것은 관객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제3자가 아닌, 자신의 주관적 경험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기막힌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감정의 변화를 동일시하도록 강요하지 않고도, 관객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몰입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무대의 연기자가 관객을 상황에 주입시키려 억지로 과장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아도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들고, 메시지가 지닌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했다. 관객은 감정이입을 통해 무대에 몰입하게 되고, 곧 작품 속에 담긴 연출의 의도까지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그래서 김준수의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은 캐릭터의 감정 속으로 빙의되듯 빨려 들어가 그의 처지와 상황에 놓여졌다. 관객은 단순히 무대 위 배우를 바라보거나 일차원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하고 조응했다. 자신의 사고와 감각, 정신은 어느덧 무대 위 ‘엘(L)’의 자리와 융합되었다.

 

‘엘(L)’에 대한 연민과 지지, ‘엘(L)’에 대한 동조와 수긍은 모든 인체 감각기관의 세포가 깨어나 듯 물리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엘(L)’의 기쁨에 환호하고, ‘엘(L)’의 눈물에 슬퍼하며, ‘엘(L)’의 죽음에 경악했다. ‘엘(L)’이 아파하면 같이 아프고, ‘엘(L)’이 뛰면 같이 뛰고, 준비운동을 하면 자신의 몸이 씰룩거리고, 격렬하게 테니스 경기를 하면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그런 면에서 그의 연기는 곧 무대와 객석의 공감이 발현되는 지점이었다. ‘엘(L)’의 감정과 행위는 객석으로 전이되며, 관객의 내면에서 재탄생했다. 관객은 무대 위 ‘엘(L)’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극이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긴장감 높게 치닫는 ‘엘(L)’의 감정은 그의 연기를 타고 객석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인 울림은 ‘엘(L)’의 자살 장면에서 극적으로 튀어 오르고 공명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에너지가 관객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무대 위 배우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는 점이다.

 

관객과의 교감은 그에게 마치 의사소통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거부감이 없다. 배우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니 관객은 더욱 탄탄하고 객관적으로 극에 몰입할 수 있다. 그것이 김준수의 공감연기가 지닌 단단한 힘이다.

 

그러고 보니 김준수는 이제껏 자신이 출연한 작품에서 관객을 무대 밖 외부세계에서 관망하는 ‘방관자’로 가만히 내버려둔 적이 없다. 데뷔작이었던 <모차르트!>부터 <드라큘라>까지 필모그래피가 쌓일 때마다 그는 진화된 연기와 캐릭터를 통해 관객과 적극적으로 교감했다.

비단 뮤지컬뿐 아니라 콘서트에서도, 텔레비전 음악방송에서도 그는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면 그 어디에서도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예민하게 공유했다. EBS 음악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했을 당시 “이 공간의 공기마저 기억하겠다.”고 말한 그였다. 그만큼 그에게 관객과의 공감은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매개체다.

 

 

이처럼 김준수 공연에서 관객과의 공감이 유기적으로 일어나는 까닭은 팬들과 지속적으로 맺어온 끈끈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번 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믿음이 마법 같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그 때문인지 김준수 공연에서는 다른 공연에 비해 훨씬 밀도가 높은 특유의 객석 몰입도와 집중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근래 들어 국내 뮤지컬시장이 양과 질적인 면에서 부쩍 팽창했지만, 종종 무대와 객석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배우와 관객의 공감력 부재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짱짱한 볼거리를 갖춘 작품이라도, 거북하고 투박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배우의 열연은 불친절하게 여겨지고, 화려한 무대장치조차 허술하게 다가서기 일쑤다. 하지만 김준수가 출연하는 작품에서만큼은 이러한 박한 평가가 불가하다.

오히려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감지수는 다소 부실한 연출의 작품이라도 이를 충분히 만회하고 상회한다. 김준수의 연기는 미학을 완성시키고, 관객의 호응은 여백을 채운다. 극장은 세대나 지역, 심지어 국가와 인종 사이 벌어지는 이질감의 경계를 뛰어넘고 아우른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이를 확인하는 또 다른 장이 되었다.

 

김준수의 ‘엘(L)’을 떠나보내며 기자에게는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공감의 질과 강도를 지수로 측정할 수 있는 매커니즘이 있다면 그의 공연에서 이를 계측하고 싶다는 바람이 그것이다. 그러자니 김준수의 차기 작품을 언제, 어떤 무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벌써 그의 다음 ‘공감’이 기다려진다. 술렁술렁 조급함이 인다.

 

-글 김범태
-사진제공 씨제스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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