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누군가 공중에서 대형 분무기를 분사하는 것처럼, 옅은 빚줄기가 계속 얼굴을 스쳤다. 그 때마다 다리가 휘청할 만큼 세찬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의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어지럽게 휘날렸고, 사람들은 옷깃을 여몄다. 제주의 쨍한 날을 기대한 여행객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을 날씨다. 그런데도 싫지 않은 기분이다.
가끔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여정이 낭만적인 법이다.
평일 오전, 붐비는 지하철 2호선에서 타인과 어깨를 부딪치고 똑같은 곳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늘 비슷한 메뉴로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정해진 코스를 일탈하지 않는 퇴근길 버스에 올라타고 창밖으로 흐르는 휘황한 간판이 지겨워질 즈음, 한 번은 자유로운 여정을 꿈꾼 적이 있다. 그럴 때면 허공을 부유하는 연기처럼, 바람처럼 여행지 이곳저곳을 떠돌고 싶은 막연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어떤 강박 때문인지, 정작 여행길에 올라서도 빽빽한 스케줄로 자유로움을 옭아맨적이 많다. 그냥 한 번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리듯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말이다.
그때는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바람의 세기나 온도, 소리에 집중 해본다. 내 목덜미를 훑고 가는 바람의 느낌, 내 옷깃을 스쳐가는 바람의 냄새가 도시의 것과는 분명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푸르른 하늘 따뜻한 바람 탁 트인 전경, 보편적으로 제주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다.
제주는 언제나 청량한 느낌을 수반한다. 그 느낌에 전적으로 동의해왔으나, 제주의 흐린 날을 우연히 접한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잊을 만하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덕분에 습기를 잔뜩 머금은 안개를 질릴때까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가도, 어렴풋이 나타나는 너른 풍경은 비 내린 제주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볼거리다. 숨을 들이쉬면 공중을 부유하던 안개의 물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숨죽인 제주의 풍경을 누려보자. 단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날에는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질 테니, 여분의 우비는 필수다. 비바람에 흩날리는 우비자락이 꽤 운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서울 도심에서 훌쩍 떠나기에 부담이 없고,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다양한 매력을 가진 탓에 최근에는 가까운 교외에 나들이 가듯 홀로 제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났다. 1인용 여행이기에 채비도 단출하다. 넉넉한 배낭과 스쿠터 하나면 충분하다.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는 탓에 떠나는 발길은 더욱 자유롭다. 비탈진 길 위에서 스쿠터의 위태로운 몸이 휘청거려도 질주는 계속된다. 속력을 낼수록 얼굴로 몰아치는 비와 바다의 냄새는 더욱 진득해진다. 스쿠터의 손잡이와 함께 손아귀에 쥔 제주 지도가 젖어있다. 그 지도는 아직 발길이 가닿지 않은 수많은 곳을 안내한다. 여정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제 막, 가속도가 붙었을 뿐이다.
어릴 적 밤바다를 본 기억이 있다. 검게 죽은 바다를 중심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은 몇 해가 지나도 여전히 선명하다. 우주 어딘가로 붕 떠오른 것처럼, 발밑이 간지러웠다. 안개가 유난히 심했던 제주에서의 어느 날, 문득 다시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머리 위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고 잿빛 안개가 그 틈 사이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반투명한 막이 덮인 듯 제주 전체가 안개에 잠식된 까닭에 하늘이 바로 눈 앞까지 내려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안개에 흐름을 따라 떠밀려 갔다가 다시 떠밀려오는 풍경에 가만히 서 있어도 끊임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기분이었다. 발밑이 다시 간지러웠다. 잿빛 안개가 포근하게 몸을 감싸 안았다.
김현청 /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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