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 세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빛도, 소리도, 이름조차 없는 공간이었으며,그곳에는 오직 혼돈만이 가득하였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혼돈의 바다 위에서, 최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세상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상상하였다.
깊은 바닷속에는 두 신이 잠들어 있었다.
압수는 맑고 순한 민물의 신이었고,
티아마트는 거칠고 무서운 짠물의 여신이었다.
이 두 존재가 만나 새로운 신들이 태어났다.
젊은 신들은 장난을 치고, 노래하며, 소란을 피웠다.
압수는 이러한 소란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조용한 세상에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젊은 신들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압수는 젊은 신들을 없애려 하였으나,
그 계획을 눈치챈 지혜로운 신 에아가 압수를 잠재웠다.
분노한 티아마트는 괴물 군단을 만들어 복수를 준비하였다.
용, 뱀, 사나운 새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괴물들이 티아마트의 편에 섰다.
이때 젊은 신들 중 가장 용감한 마르둑이 나섰다.
“내가 티아마트와 싸우겠다.”
마르둑은 번개와 폭풍을 무기로 티아마트와 맞섰다.
하늘이 흔들리고, 바다가 뒤집혔다.
마침내 마르둑은 티아마트를 쓰러뜨리고,
그 거대한 몸을 둘로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별과 달, 해가 생겼으며,
마르둑은 신들의 노역을 대신할 존재, 즉 인간을 창조하였다.
이와 같이 혼돈의 바다에서
질서와 세상이 태어났다.
중국의 고대인들은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알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
알 속에는 음과 양이 뒤섞여 있었다.
수천 년, 수만 년이 흐른 뒤
알 속에서 거대한 존재가 눈을 떴다.
그의 이름은 반고였다.
반고는 답답한 알껍데기 속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
고 생각하며 도끼를 들어 알껍데기를 쳤다.
쨍—
알이 갈라지자,
가벼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다시 합쳐지려 하였다.
반고는 두 팔로 하늘을 밀어 올리고,
두 발로 땅을 눌렀다.
1만 8천 년 동안
반고는 점점 커졌고,
하늘과 땅은 점점 멀어졌다.
마침내 반고가 쓰러져 죽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눈은 태양과 달,
피는 강,
뼈는 산,
머리카락은 별,
땀은 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속에 있던 작은 벌레들은
인간이 되었다.
이와 같이 거인의 희생으로
세상과 인간이 태어났다.
한반도에는 신비로운 산이 있었다.
그곳에는 하늘의 신 환인이 거주하였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다.”
고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환웅은 3천 명의 신하와 함께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신단수 아래,
바람이 부드럽고,
햇살이 따스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곰과 호랑이가 있었다.
둘 다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이것만 먹으라.”
고 하였다.
호랑이는 며칠 만에 포기하고 뛰쳐나갔으나,
곰은 어둡고 좁은 동굴에서
참고 또 참았다.
마침내 21일째
곰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였다.
곰 여인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다.
환웅은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고조선을 세우고,
한민족의 시조가 되었다.
세상의 시작을 노래하는 신화들은
서로 다른 땅과 언어, 시대를 넘어 놀라운 공통점을 품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신들은 혼돈의 바다에서 싸움을 벌이고, 마르둑의 결단으로 세계가 탄생한다.
중국의 거인 반고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하늘과 땅을 갈라내고,
한국의 곰은 어둠 속에서 인내하며, 하늘의 신과 만나 새로운 민족의 시조가 된다.
이 세 신화의 중심에는 혼돈(카오스)과 질서(코스모스)의 대립이 존재한다.
어둠과 무질서, 불확실함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 속에서 누군가의 결단, 희생, 인내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혼돈 속에서 의미와 질서를 찾으려는 존재였다.
바빌로니아의 신화는 권력과 책임, 두려움과 용기의 대립을 보여준다.
반고의 신화는 우주의 탄생이 곧 희생과 변화의 결과임을 말한다.
단군 신화는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신과 인간의 만남이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신화들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최초의 철학적 사유이자,
상상력의 힘으로 혼돈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집단적 꿈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신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아 있는 질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두려워하고,
예기치 못한 혼돈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며,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찾아 헤맨다.
창조 신화는 인간의 본질적인 갈망을 비춘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세상은 왜 이토록 복잡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가?”
“내가 할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시대와 문명을 넘어
모든 인간이 품는 철학적·인문학적 탐구의 시작점이다.
신화 속 영웅과 신들은
각자가 마주하는 혼돈과 두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다.
마르둑의 결단은
두려움에 맞서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용기이다.
반고의 희생은
자신과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고통과 아름다움이다.
곰의 인내와 환웅의 만남은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기적이다.
창조 신화는
단순히 옛사람들의 상상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상상력의 기록이다.
이 신화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각자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쓰이고 있다.
김현청 | Brian KIM, Hyuncheong
블루에이지 회장 · 서울리더스클럽 회장 · 한국도서관산업협회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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