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담쓰談 17]
“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봐라.”
아버지는 아들이 입고 들어온 고급 청바지를 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며칠째 다그쳤습니다. 성화에 못이긴 아들이 마침내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죄송해요. 버스정류장에서 지갑을 훔쳤어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내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치다니….’
잠시 뒤 아버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시켰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마음 아파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판이 있던 날 법정에서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 주세요.”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통회의 눈물을 흘렸고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왔습니다.
“불처분입니다.”
벌을 내리지 않은 뜻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 하는 당사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이를 아버지로 둔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정해진 기준으로 부모가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능력이 출중하거나 권력이 있어야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부모는 감화의 원천인 까닭에 그 자녀를 얼마든지 위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부모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부모가 위대한 것입니다. 무아적인 사랑과 기도는 부모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치매에 눈까지 어두운 노인이 방안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다 신문을 읽던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범아,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 이름이 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아버지! 까마귀입니다.”
잠시 물끄러미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노인은 다시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범아, 저 나무에 있는 검은 새 이름이 뭐냐?”
나뭇가지에 있는 새를 힐끗 쳐다보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건 까마귀에요. 까마귀도 모르세요?”
어린아이처럼 귀찮게 질문을 하는 늙으신 아버지에게 아들은 짐짓 짜증 섞인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까마귀는 나뭇가지 이곳저곳을 날아다녔습니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노인은 방금 전에 아들에게 했던 질문을 까맣게 잊고 또다시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범, 저기 날아와 놀고 있는 저 새는 무슨 새지?”
아들은 이제 무슨 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신문을 내려놓고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닫으며 볼멘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까마귀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창문이 가려지자 노인은 쓸쓸히 돌아누우며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돌 지난 아들이 신이 나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저 새 이름이 뭐예요?”
“응, 그건 까마귀란다.”
잠시 후 아들은 또다시 물었습니다.
“아빠! 저 새 이름이 뭐예요?”
“응, 그 새 이름은 까마귀란다.”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 어린 아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질문을 했고 아빠는 그럴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수십 번, 수백 번 물어도 아버지는 귀찮기보다는 그런 아들이 정겹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인터넷 동영상으로 떠돌던 이 이야기를 접하며 조선 말기의 가객 박효관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뉘라셔 가마귀를 검고 흉(凶)타 하돗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긔 아니 아름다온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허하노라.”
풀어보면 “누가 까마귀를 검고 흉한 새라고 하였던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주어 은혜를 갚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도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입니다. 이 시에 기록된 반포보은(反哺報恩)은 “자애로운 까마귀가 돌이켜 먹인다.”는 뜻으로 어미의 먹이를 받아먹던 까마귀가 다 자란 후에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반포보은의 유례는 중국 진(晉)의 황제 무제(武帝)가 건위(犍爲) 무양(武陽)의 신하였던 이밀(李密)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지만 늙은 할머니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관직을 사양한 고사(故事)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제는 이밀이 관직 사양하자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이밀은 자신을 까마귀에 비유하며 “까마귀가 어미 새의 은혜에 보답듯이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만 봉양하게 해주십시오(烏鳥私情, 願乞終養).”라고 응답했습니다.
명(明)나라 말기의 학자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까마귀는 부화한 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이후 새끼가 다 자라면 먹이 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에게 ‘인자한 까마귀’ 자오(慈烏) 또는 반포조(反哺鳥)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어쩌면 치매 걸린 아버지가 바라보던 그 까마귀는 고사에서처럼 늙은 어미에게 물어다 줄 먹이를 찾으며 나뭇가지를 옮겨 다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누군가에게 모욕적인 욕을 할 때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하는데 반포보은의 고사를 읽어보니 부모공경에는 때로 새만도 못한 게 인간인가 봅니다.
장성한 자녀를 둔 노인들 중에는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식농사를 망친 것 같다.”며 후회하는 말을 합니다. 돌아보니 자식을 향한 희생과 사랑이 서툴지 않았나 아쉽기만 하답니다.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으며 가르치고, 금이야 옥이야 길렀는데 자식들은 부모를 원망하고 무시합니다. 반면, 아량과 너그러움으로 자식을 키운 부모도 훈육과 회초리로 키운 부모처럼 자식 교육에 후회가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집중한 부모들이나 일 때문에 자유롭게 자녀를 키운 부모들이나 아쉬운 마음에 자녀가 어렸던 과거로 돌이키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겸양과 희생을 강요하며 키운 자녀나 기를 세워줘야 한다며 멋대로 풀어준 자녀나 늙은 부모를 대하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자식으로 인해 기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자식 때문에 아리고 애잔합니다. 간혹 늦게 철이든 자식이 자식 노릇하려는데 세월이 무상합니다.
필자가 몇 해 전, 자식들 모두 객지로 떠나보내고 소식을 궁금해 하실 부모님과의 소통을 위해 어머님께 스마트폰을 구입해드렸습니다. 자식들 손자, 며느리들이 즐겨하는 카카오톡이나 카카오 스토리, 네이버 밴드를 이용하시도록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안부 전화 하나도 익숙지 않는 필자의 무심함을 무마해 보려는 시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스마트폰을 드린 지 이틀 만에 어머님의 카카오 스토리에 당신이 직접 찍으신 프로필 사진과 함께 첫 글이 올라왔습니다.
“나아무것도할줄몰라”
띄어쓰기도 안 된 글을 보며 미소가 번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 편에는 짠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시다니요. 평생을 통해 가정을 일구시고 5남매를 잘 키우신 어머니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셨습니다. 자랑스러운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필자 역시 자식이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아이는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철썩 달라붙어 아빠 껌딱지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샤워 후 팬티만 걸치고 나와도 거침없이 달려와 안기고, 옷을 훌렁훌렁 벗고 이 방 저 방 유유자적 거닐고, 헤어지면 아쉬워라 수십 번도 넘게 지지뽀뽀를 하던 딸아이가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제 방문을 꼭 잠그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고 친구들과 노느라 전화도 안 받고, 뽀뽀는 기분이 좋아야 한 번 해주고 부리나케 입술을 닦아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언제 오냐고 빨리 오라고 하던 녀석이 지금은 아빠가 오든지 가든지 서운해 하지도 않습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겠지요. 이제 아빠만 최고라던 녀석에게 문고리 꼭 잠그고 울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할 테고 유치원에서 아빠에게 쓴 편지를 담아두었다 보여주던 서랍에는 자기만의 비밀 일기가 생길 겁니다. 어른이 되어가며 이유 없이 슬픈 날들도 지날 테고 저만의 가슴 절절한 사연들도 생기겠지요. 어쩌면 제 엄마처럼 못난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내려놓을 것 내려놓고 포기할 것 포기하고 정 때문에 자식 때문에 그렇게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딸아이에게 이제는 아빠 말고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줘야 하나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우울하고 어른이 되었음이 서글퍼질 때마다 달려와 마음 놓을 수 있는 키다리 아저씨말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앞에서 방패가 되어주었다면 어른이 되어가는 자식에게 부모로서 아비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뒤에서 묵묵히 바라봐주고, 자식이 힘에 겨워 돌아보면 외롭지 않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 그것뿐인가 봅니다.
김현청 / brian@hyuncheong.kim
–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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