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들을 이웃한 숲 하나

사려니숲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이 아닌 나무 얘기다. 저마다의 나이와 잎사귀를 가진 나무들은 모두 초록빛 얼굴로 웃는다. 초록에 초록이 모이고 또 다른 초록이 이어져 햇살 아래 빛난다. 그 모습이 마치 흐드러지게 핀 한 송이의 꽃 같다. 그 아래 적갈색 흙길이 이어져 그 길을 걸어본다.

 

작은 우주, 혹은

한라산 동쪽, 오름들을 이웃한 다정한 숲이 있다.
‘신성한 곳’이라는 이름의 사려니숲.

그래서일까.
사려니 숲길에 들어서면 시공간을 초월한
다른 어떤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용하고 청명한 세계.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 사이에 서면,
나무의 품에 안긴 것만 같다.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나뭇가지와 가지들을 채우는 무성한 잎이 두 눈 가득 담긴다.
고요한 숲의 소리가 들리고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여기는 작은 우주가 아닐까.

 

숲길을 걷는다는 것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에 있는 입구에서 시작해 물찻오름을 지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진다.

물찻오름에서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길은
출입금지 구간이기 때문에
물찻오름을 지나 붉은오름 쪽으로 나가거나

새왓내숲길 순환로를 가볍게 걸어도 좋다.
숲길은 산에 비해 완만해서 좋다.
평탄하게 이어진 길을 산책하듯 걸어본다.
산처럼 힘을 내어 올라가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어린 아이도,
나이든 어르신들도 많이 보인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연인들,
아빠의 목말을 탄 아이,
소풍 온 학생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까지.
모두의 마음에 숲의 공기가 가득 채워진다.
보드라운 흙이 기분 좋게 밟힌다.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데 없이 발길 가는대로 갈 것”이라는
어느 노래처럼, 숲길을 걷는다는 건 그저 걸어도 즐거운 것일 테다.

 

 

 


작은소설

 
나는 지금 숲 한 가운데 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기억을 지우고 시공간을 이동한 것처럼,
눈을 떠보니 숲이 있었다. 숲길을 마냥 걸었다.
이상하게 사람도 보이지 않고 이정표도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나무만 이어져 있다.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반가워.”
인사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청자색 꽃잎을 흔들며 산수국이 웃는다.
그에게 길을 물어보니 마음 가는 대로 걸으면 된단다.

“그런데 혹시 나를 아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든가.”

그는 옆에 있는 때죽나무에게 한번 가보라고 말한다. 오솔길을 한참 걷다보니 새하얀 때죽나무가 서 있었다.
반질반질한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스님이 떼로 몰려있는 것 같았다.

“아, 너로구나. 산수국에서 얘기 들었어. 며칠 전 이 길을 지나가는 너를 봤어.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졸참나무가 끼어든다.

“나도 봤어. 갈색 가방을 들고 지나가던 걸. 그런데 그 가방은 어쨌니?”
나는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을 다시금 펼쳐보았다.

“가방이라고? 글쎄,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내게 가방이 있었단 말이지…”
순간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작은 희망이 생긴 것 같아 힘이 났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가방에 대해 물었다.
“혹시 내 갈색 가방 본 적 있니?”

삼나무도, 산딸나무도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다고 말했다.
그때, 저만치 떨어진 서어나무 뒤에 숨어있던 노루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동그랗고 까만 눈을 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가방, 까마귀가 물어가던 걸.”

숲의 지리를 잘 안다는 오소리를 따라 까마귀를 찾아다녔다.
떨어진 솔방울들이 힘내라고, 잘 될 거라고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며칠을 찾아다녔을까.
드디어 갈색가방을 갖고 있다는 까마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가방이 네 것이로구나. 본의 아니게 가져가서 미안. 숲에 버려져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말하더라고. 그 가방 안에 숲의 비밀이 들어있다고. 그래서 가져왔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비밀을 찾을 수 없었어.”

말없이 있던 표고버섯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제안했다.
“모두 함께 모여 가방을 풀어보자.”

그날, 숲의 모두가 모였다. 산수국, 산딸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 삼나무, 서어나무, 노루, 오솔개, 까마귀, 떨어진 솔방울, 표고버섯은 물론이고 숲에 살던 모든 생명들과 지나가던 바람과 햇살, 흙과 물도 자리를 채웠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숲이라는 이름의 작은 씨 하나가 있었다.

그 씨를 땅에 심고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현청 /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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