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직 아무 이름도 가지지 못한 채 잠들어 있던 시간, 빛도 그림자도 태어나지 않았던 그 전(前)의 순간, 우주는 단지 하나의 숨결도 없이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시작조차 없는 시작, ‘무’(無)조차 인식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총체적 혼돈(Chaos). 이 침묵과 어둠의 거대한 심연 속에서, 마치 자연스레 스며나오듯 무엇인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존재’라는 개념을 품은 의지였다. 이름 없는 그 존재는 의식도 없고 형태도 없었지만, 스스로를 구별하는 첫 번째 떨림이었다. 바로 그 순간, 태초의 신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확장, 혹은 혼돈이 자기를 인식하면서 파생된 현상적 존재였다. 신이라 불리기 이전, 이들은 ‘근원’이었다.
태초의 신들은 쌍으로, 혹은 대비되는 속성으로 나타났다. 각각은 상징적 에너지이자 질서의 씨앗이었다.
먼저 나타난 것은 어둠의 여신 ‘녹스(Nox)’와 빛의 신 ‘아이테르(Aether)’. 녹스는 모든 것을 감싸는 무한의 밤, 깊은 잠과 종말의 씨앗을 품은 자였고, 아이테르는 그 반대로 첫 번째 광명의 떨림, 형태와 의식의 싹이었다. 둘은 서로를 견제하며, 동시에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원적 균형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 안에 수천 겹의 생명을 잠재우고 있었으며, 땅이란 단어조차 없던 세계에서 무게와 기반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가이아는 곧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를 낳았다. 우라노스는 확장과 덮음, 하늘의 지붕으로서 가이아를 감싸며 공간의 개념을 부여했다.
그리고 바람의 신 ‘아네모이(Anemoi)’, 물의 여신 ‘탈라사(Thalassa)’가 등장하면서, 세계는 점차 움직임과 순환, 흐름을 얻게 되었다. 정체되어 있던 혼돈은 이 신들에 의해 처음으로 방향성을 갖기 시작했다. 물은 형태 없이 모든 틈으로 스며들며 경계를 허물었고, 바람은 움직임과 숨결을 불어넣으며 생명의 전조를 만들었다.
신들은 자신들의 속성과 힘으로 무형의 세계에 첫 번째 규칙을 심었다. “어둠은 밤이라 불릴 것이며, 빛은 낮이라 불릴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최초 정의는 곧 이름 짓기(name giving)에서 비롯되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신들은 무정형의 상태에 경계와 구분을 주었고, 이로써 우주는 비로소 ‘형태 있는 세계’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초의 신들은 창조주의 전능한 존재라기보다, 서로 다른 속성 간의 충돌과 조율을 통해 현실을 빚어낸 원소적 의지였다. 그들은 절대적 권위자가 아니라 세계의 골격을 구성하는 원형(archetype)으로 존재했다. 창조는 어떤 목적을 가진 계획이 아니라, 마치 만물이 자기 조직을 찾으려는 자연의 내적 논리처럼 전개되었다.
이러한 질서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결국 시간의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다. 시간은 곧 변화이며, 변화는 곧 생명의 시작이자 끝을 뜻했다. 이후 태초의 신들은 저마다의 세계로 흩어졌고, 새로운 신들, 즉 세대 신들(Titans, Olympians 등)의 탄생을 예고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물러나듯 축소시켜 갔다.
그리스인들은 이 첫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처음에 카오스가 있었다.”
그것은 끝없는 구렁텅이, 무(無)도 유(有)도 아닌 상태였다.
거기서 가이아가 나왔다. 그녀는 단단한 대지였고, 모든 생명의 품이었다.
그 옆에는 타르타로스가 생겨났다. 끝없는 심연, 세상 가장 밑바닥의 감옥이었다.
사랑의 힘을 상징하는 에로스,
빛 없는 그림자 에레보스,
깊고 고요한 밤의 여신 닉스도 그곳에서 눈을 떴다.
가이아는 홀로 서 있는 하늘을 보고, 그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스스로 우라노스를 낳았다.
하늘과 대지가 처음 맞닿은 순간, 세상은 비로소 숨을 쉬었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티탄들을 낳았고, 거인과 키클롭스, 그리고 바다의 신들을 길러냈다.
닉스는 어둠 속에서 죽음, 꿈, 운명을 상징하는 신들을 낳았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에는 낮과 밤의 경계, 빛과 어둠의 리듬이 생겨났다.
이집트의 세상은 물로 시작했다.
그 물은 끝을 알 수 없었다.
그 깊은 바다를 사람들은 **누(Nu)**라 불렀다.
물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는 모든 생명의 씨앗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물 위로, **라(Ra)**가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낳은 태양이었다.
라가 눈을 뜨자, 세상은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그의 숨결에서 다른 신들이 태어났고, 눈물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라가 하늘을 가르며 떠오를 때, 어둠은 물러났다.
사막 위의 금빛 모래가 빛을 받아 반짝였고, 나일강의 물결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라의 하루는 영원한 순환이었다.
동쪽에서 떠올라 세상을 비추고, 서쪽으로 기울며 밤의 강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어둠 속을 건너 다시 새벽을 데려왔다.
이집트 사람들은 매일 그 빛을 맞으며 속삭였다.
“오늘도 라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북쪽의 세상은 혹독했다.
하늘 끝에는 얼음의 땅 니플헤임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불의 땅 무스펠헤임이 있었다.
둘 사이의 거대한 심연, 긴눙가가프에서 차가운 숨결과 뜨거운 숨결이 부딪쳤다.
얼음이 녹아내리며 생긴 물방울 속에서 거인 **이미르(Ymir)**가 태어났다.
이미르의 몸은 거대한 산맥 같았고, 숨소리는 폭풍 같았다.
그의 땀구멍에서 새로운 거인들이 생겨났고, 다리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르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들이 그를 쓰러뜨리고,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의 살은 땅이 되고, 뼈는 산맥이 되었으며, 피는 바다가 되었다.
머리뼈는 하늘이 되고, 뇌는 구름이 되었다.
이 땅의 모든 바람과 비, 하늘과 대지가 이미르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다.
북유럽의 창조 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희생 위에서 태어난다.”
중국에서는 혼돈의 알 속에서 반고가 깨어났다.
그가 알을 쪼개자 위쪽은 하늘이 되고, 아래쪽은 땅이 되었다.
반고는 하늘과 땅이 다시 합쳐지지 않도록 하루하루 조금씩 그 사이를 넓혔다.
그가 쓰러진 후,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되었으며,
피는 강이 되고, 뼈는 산이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여신 여와가 황토로 인간을 빚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압수와 티아마트가 최초의 신이었다.
그들의 피와 살에서 세상이 생겨났고,
인도의 베다 신화에서는 원초의 인간 푸루샤가 희생되어
그의 몸에서 하늘, 땅, 동물, 사람, 그리고 모든 존재가 태어났다.
이 최초의 신들은 세상의 건축가이자 첫 조각가였다.
그들은 혼돈 속에서 눈을 떴고, 스스로를 낳거나 결합하거나 희생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그 과정은 언제나 고통과 기적이 함께했다.
태초의 신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모든 시작에는 혼돈과 가능성이 있고,
그 혼돈을 꿰뚫는 창조의 힘이 있다는 것.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일은 곧,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다.
태초의 신화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던진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 각자의 내면에도 작은 ‘카오스’가 있다.
그 혼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시작이 태어난다.
태초의 신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라. 그리고 그 시작이 되어라.”
김현청 | Brian KIM, Hyuncheong
블루에이지 회장 · 서울리더스클럽 회장 · 한국도서관산업협회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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