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하우스 박진원
(웃음)예. 만 4년쯤 되었어요. 제 자신이 점(dot)같아지는 곳을 찾다보니 제주가 딱이다 싶었죠. 사실 제가 요즘 흔히들 말하는 ‘결정장애’가 있어요(웃음). 그래서 옷도 음식도 무지 망설이는 편인데요. 역설적으로 그런 성격 때문에 일부러라도 이주와 같은 큰 결정들은 상당히 즉흥적으로 하는 편입니다. 큰 아우트라인까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거 같거든요.
그럴 지도 모르죠. 저 역시 지금은 제주에서 나름 정착해 잘 살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지금의 마음이에요. 예전엔 그 당시에만 가지고 있던 가치가 있었고 지금은 지금만의 가치가 있어요. 단지 이 곳에서의 삶을 택한 이유는 그저 좀 더 가치를 두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로인해 낭패를 보는 경우도 생기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중하고 지금의 나를 존중하려 노력해요. 그 마음이 한시적인 것인가 장기간에 걸친 마음인가 하는 문제는 그 후의 일 일 거예요. 비슷한 맥락에서, ‘제주에 대한 환상과 현실’은 제주 이주자에게는 가장 단골 질문이면서 어쩌면 가장 진부한 질문인 것 같아요(웃음). 근데 제주라고 별다를 건 없어요. 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더 쉬운 것도 아니고. 요즘 같은 시대에 살던 그 자리에 있다고 한들 쉽지 않을 걸요. 요즘 제주 이주가 이슈화 되면서 ‘제주살이, 만만치 않다. 환상을 깨라’ 뭐 이런 말도 종종 들려오지만, 어느 곳이든 쉬운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한 가지는 ‘과한 환상’을 안 가진다면 현실의 어려움도 덜어질 거란 거예요.
가장 작은 변화라. 어렵네요. 아, 샤워 후 바디로션을 바르지 않게 되었습니다(웃음). 피부가 건조한 편이라 서울에 있을 때는 바디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당기고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제주에선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서울에서의 저는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저는 많이 유(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시골에선 아무래도 몸을 움직일 일이 많다보니 몸무게가 20kg 가까이 빠지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살이 빠진 게 아닌 독이 빠진 게 아닌가 해요(웃음). 그것이 가장 큰 변화이자 행복한 변화이기도 합니다.
지독하게도 1인칭 모드로 살아왔던 제가 3인칭 모드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삶을 대하는 태도랄 것도 없는 것이 너무 현실에 몰두해 앞도 옆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았거든요. 어쩌면 보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노릇이고요. 제주에 내려오고 이제야 조금씩 저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나 자신’을 인식하고 발견할 수 있는 순간들이 더러 있는 요즘입니다.
정말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제주라서 제주이기 때문에 경험했던 특별한 순간 하나만 이야기해볼게요. 516도로 마방목지 근처에서 어마어마한 먹구름 속을 차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516도로는 한라산 중산간에 위치해 구름이 잦게 끼는 곳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터라 서행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차 한 대가 상향등을 켜고 무섭게 따라와 칼치기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순간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채로 앞차 뒤꽁무니만 보며 달렸죠.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광명이 비치면서 파란 하늘이 드러나는데 순간 멍해지더라고요. 무심코 브레이크를 밟으니 다시 까만 먹구름 속으로 들어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액셀을 밟으면 다시 말도 안 되게 청명한 하늘이 나타나고. 마침 라디오에선 Keren Ann의 ‘Not Going Anywhere’이 흘러나오고. 구름에 경계에 있는 그 기분이 되게 묘한 것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더라고요(웃음).
슬프지만 이삼일의 짧은 여행으론 제주의 단편적인 부분밖엔 못 보는 게 사실이잖아요. 가라지하우스는 제가 정착하면서 느낀 제주의 다채로운 모습을 여행자들에게도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한 달 이상 제주에 내 집처럼 편안히 머물 수 있는 ‘한달살기 셰어하우스(shared-house)’와 천천히 제주를 느끼고픈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입니다.
그렇죠.
제가 생각하는 ‘느린 여행자’의 표본은 ‘혼자 여행자’와 ‘뚜벅이 여행자’입니다. 제공되는 대부분의 서비스나 인테리어는 이분들을 생각하며 디자인된 게 사실이고요. 만약 가라지하우스에 혼자 오셨다면, 아마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밥 먹었어요?’와 ‘같이~할래요?’일 거예요.
즉흥적인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자면 노을이 심상치 않은 날엔 게스트들을 트럭에 욱여넣고(웃음) 이름 없는 일몰 포인트로 데리고 가기도 하고요. 인공조명 하나 없는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다 같이 별을 보기도 합니다. 더운 계절엔, 높은 언덕에 트럭으로 게스트들을 자전거 채 내려다 놓고 다운 힐을 시키기도 하고, 추워지면 한라산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어묵탕도 끓여 먹고요. 즐길 시간도 없이 랜드마크를 찍으며 다니는 정신없는 관광이 아닌 새로운 영감을 얻어 갈 수 있는 느린 순간을 만드는 것에 집중해요.
-가라지하우스 instagram.com/jejugaragehouse, garagehouse.kr
김현청 brian@hyuncheong.kim
–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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