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법’은 늘 두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몽둥이였고, 하나는 방패였다.
몽둥이로 쓰일 때 그것은 법률통치였고, 방패로 쓰일 때 그것은 법치였다.
문제는, 어느 시대든 권력은 몽둥이를 쥐는 순간 방패를 내려놓았다는 점이다.
서구의 역사: 법의 자리를 놓고 벌인 오랜 싸움
중세 유럽에서 법은 곧 왕의 말이었다.
왕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왔다고 믿었고, 법은 그 권위를 포장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1215년, 영국의 귀족들이 존 왕에게 마그나 카르타를 서명하게 만든 사건은 흐름을 바꿨다.
“왕도 법 아래에 있다”는 발상, 법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는 그 씨앗을 키웠다.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사상은 권력의 손아귀에서 법을 빼앗아왔다.
법은 더 이상 권력의 장식품이 아니라, 권력을 가두는 철창이 되어야 했다.
이것이 rule of law다.
그러나 20세기 초, 파시즘과 나치즘은 법을 다시 몽둥이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의회 다수와 합법 절차를 통해 독재권력을 획득했고, 뉘른베르크법 같은 악법을 ‘법률’로 제정했다.
형식은 법치였지만, 내용은 법률통치였다.
여기서 드러난 진실: 법이 있다고 해서 법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압축 경험
한국은 이 법의 두 얼굴을 1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다 봤다.
1948년 제헌헌법은 법치국가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한국전쟁과 권위주의 정권이 뒤덮었다.
- 이승만 시기: 국가보안법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법률통치의 도구였다.
- 박정희 유신체제: 긴급조치는 헌법을 무력화하고, 법을 권력 유지 장치로 전락시켰다.
- 전두환 5공화국: 합법 절차를 가장한 군사쿠데타의 제도화.
- 박근혜 정부: 사법부 길들이기와 법치의 정치화.
- 윤석열 정부: 12·3 비상계엄과 법치주의의 최종 파탄. 한국 현대사에서 법치주의가 완전히 파탄난 극단적 사례.
이 권력자들에게 법은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권력자의 의지를 관철하는 명령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정치사에서 법치의 두 얼굴은 뚜렷한 패턴을 보여준다.
첫째, 모든 권력자가 ‘법치’를 자신의 전유물로 주장했다. 이승만부터 윤석열까지, 권력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권력 행사를 ‘법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둘째, 위기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법을 권력 유지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긴급조치, 비상계엄, 국가보안법 등이 모두 이런 용도로 사용됐다.
셋째, 민주화 이후에도 법률통치의 관성은 지속됐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법을 정치적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패턴은 계속됐다.
넷째, 시민사회의 저항이 진정한 법치를 실현하는 원동력이 됐다.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 그리고 12·3 계엄 저지 등 모든 민주화 국면에서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헌법적 가치를 수호했다
민주화 이후의 법치와 그 한계
1987년 민주화는 법치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헌법 개정으로 권력 분립, 기본권 강화,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됐다.
그러나 법률통치의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 법 해석이 바뀌고, 입맛에 맞는 법률이 속전속결로 통과됐다.
공수처, 검찰개혁, 선거법 개정 등 굵직한 법률 변화도 절차적 합의보다 정치적 힘겨루기로 진행됐다.
“법대로”라는 말이 권력의 입장에서만 울리는 순간, 시민의 법감정은 흔들린다.
왜 지금이 위험한가
오늘날 한국의 정치·행정 언어 속에는 ‘법치’와 ‘법률통치’가 뒤섞여 있다.
권력은 ‘법과 원칙’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 구조를 설계한다.
SNS와 미디어는 이를 정교하게 포장해 ‘정당한 집행’으로 보이게 한다.
결국 우리는 형식적 법치 속에서 살지만, 실질적 법치는 취약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다.
법이 권력을 제한하지 못하면, 어느 날 갑자기 권력은 법을 무기로 삼아 우리를 향할 것이다.
법치의 미래 ― 균형을 되찾는 일
법치와 법률통치의 경계는 종이에 그린 선이 아니라,
권력을 어디에 묶어 두느냐의 문제다.
그 선을 지키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하다.
- 입법의 정당성: 법률 제·개정 과정이 투명하고 공론을 거쳐야 함.
- 사법의 독립성: 법 해석이 정치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함.
- 시민의 법 감시: 법을 ‘외부 권위’로만 보지 않고, ‘나의 권리 문서’로 인식하는 문화.
민주주의는 법이 권력을 구속하는 데서만 유지된다.
그렇지 않으면 법은 언제든 칼날로 변해 시민을 겨누게 된다.
법률통치는 말 그대로 ‘법률에 의한 통치’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서 법은 권력자가 만든 명령문일 뿐이다.
그 법이 인권을 보장하는지, 절차가 정당했는지, 헌법 정신에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목적은 통치, 수단은 법률.
나치 독일의 뉘른베르크법, 일제 강점기의 치안유지법이 모두 이런 방식이었다.
이 구조에서는 법이 ‘방패’가 아니라 ‘몽둥이’다.
권력은 자신에게 불리한 법은 만들지 않고, 만들어진 법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그러니 국민에게 “법대로”란 말은 곧 “권력 뜻대로”가 된다.
법치는 법이 권력을 가둔다는 원리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시민이든 모두 법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법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을 제한하는 데 있다.
이 구조에서는 법이 ‘규칙서’이자 ‘심판’이다.
누구도 그 위에 설 수 없다.
그래서 권력자가 법을 바꾸려면, 절차를 거치고, 공론을 모으고, 헌법에 합치해야 한다.
그 번거로움이 바로 법치의 안전장치다.
둘 다 겉모습은 비슷하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고, 법원에서 판결하고, 경찰이 집행한다.
그러나 법률통치는 법이 권력의 하인이고, 법치는 권력이 법의 하인이다.
문제는, 권위주의적 정권일수록 이 차이를 흐린다는 점이다. “우린 법에 따라 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 좋지만, 그 법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는 감추어진다.
한국의 헌법은 분명 법치국가를 지향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행정은 종종 법률통치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정권이 바뀌면 법 해석이 뒤집히고, 필요하면 입맛에 맞는 법률을 신속하게 통과시킨다.
그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나 절차적 정당성은 뒷전이 된다.
공론장은 이런 문제를 ‘정치 공방’으로만 소비한다.
그러나 법률통치와 법치의 차이는 단순한 정치 프레임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법이 권력을 제한하지 못하면, 시민은 언제든 법을 들이댄 권력 앞에 무력해진다.
법률통치냐 법치냐를 가르는 경계는 간단하다.
법이 권력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권력의 도구인가.
민주주의는 그 경계를 지키는 제도이자 습관이다.
당신이 사는 나라에서 법은 지금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그 법은 당신을 지키는 방패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쥐어진 몽둥이인가?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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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brian@hyuncheong.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