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갈등은 사랑의 부족이 아니라,
제도의 과잉 때문이다.
며느리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단순한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직책이고, 의무이고,
심지어 감정까지도 규정당한 ‘역할’이다.
‘며느리 노릇 잘한다’는 말엔,
배려와 이해, 인내와 침묵이라는
도덕적 미덕이 미리 삽입되어 있다.
거기에 ‘기쁨’이나 ‘자기 뜻’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녀가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지켜야 했던 건
다름 아닌 ‘효’였다.
하지만 그 ‘효’는 유독 여성에게만 요구되었고,
유교 전통과 가부장제는
그 효심을 ‘며느리의 덕목’으로 치환했다.
그래서 며느리는
자신의 친부모보다 시부모에게 더 공손해야 했고,
자신의 감정보다 가족의 화목을 먼저 배려해야 했으며,
자신의 몸보다 시댁의 체면을 앞세워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노력’이 아니라 ‘기본’으로 간주되었다.
며느리가 느끼는 억울함은
사소한 갈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축적된
‘당연함’의 폭력 때문이다.
명절마다 부엌에서 허리를 굽히며도
감사는커녕 ‘당연하지’라는 눈빛을 받는 순간,
그녀는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만 존재한다.
‘네가 참아야 가정이 편하다’는 말,
‘며느리가 어른 공경 못하면 자식 복 없다’는 말은
도리와 가족애를 가장한
정서적 강요이자 감정노동의 착취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진다.
그녀는 왜 자신의 감정을 죄책감으로 바꿔야 했을까.
왜 자신의 권리를 불편함으로 처리해야 했을까.
이제는 말해야 한다.
고부갈등은 단순한 시기심이나 질투가 아니다.
그건 억압된 구조에서 파생된 ‘역할 충돌’이며,
며느리 한 사람에게 집중된
비정상적 감정 노동의 파편들이다.
며느리의 페미니즘은
누구를 적대하는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 외의 것을 강요하지 말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선언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며느리를 통해 ‘가족’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한 사람의 여성은 얼마나 지워지고 있었을까.
효를 말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여성의 분노와 지침을
미덕이라는 말로 눌러왔는가.
그것이 정말 ‘효’였을까?
진짜 효란,
가족 구성원이 서로에게 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엄마로만 보지 않고,
한 명의 독립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
‘좋은 며느리’라는 말 대신,
‘행복한 나’라는 말이
이제는 더 자연스러워야 한다.
며느리가 먼저 웃을 수 있어야,
가정도 비로소 평화로워진다.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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